<aside> 💡 "무엇보다도 전문가나 전문직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우해주지 못했다…"(2000년, 의약분업 직후 신문기사)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한 정부 정책은 반드시 실패할 것"(2020년, 의사 파업 당시 의사들의 말)
"의료정책을 비전문가가 일방적으로 좌우해선 안 된다"(2023년, 의사 증원 관련 의견 중)
중요한 사회적 국면에 갑자기 나타나 여론을 좌우하고, 지식으로 무장한 자신들의 의견을 들으라며 호통을 치고, 때로는 정파적인 이용까지 감내하는 그 이름. 전 문 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신비로운 용법으로 사용되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전문가'를 선택하겠습니다.
특히 의료처럼 한국사회가 전문성과 권위를 마음껏 인정하는 영역이라면 '전문가,' 혹은 전문가를 이용하고 싶어하는 끄나풀들의 활약은 더 화려해집니다. 전문가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점잖은 조언은 기본, 말을 듣지 않으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진다"는 '협박'은 선택. 1999년 의약분업이 남긴 구호 "약은 약사에게 의사는 의사에게" 뒤에는 마치 "보건의료는 전문가에게" 가 붙어있는 듯 합니다.
의대 증원 논의가 달아오르는 2023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없고 병원이 없어 시름시름 앓는 지역사회를 두고 그래도 역시 '전문가'와 논의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들이 솔솔 피어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바꿔 '전문가'와 시민들에게 물어봅니다. 시민의 삶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 는 누구인가요? 허리와 다리가 너무 아프다던 순이 할머니가 여태 병원에 가지 못한 이유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미지의 감염병 사태에서 우리 지역 경로당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요? 혹시 '전문가' 뒤에 놓인 이름, 시민과 주민이 아닐지요. 그런데 도대체 왜, '시민'은 우리 사회의 주인 노릇을 좀처럼 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전문가란 무엇이냐” 질문을 던지며 함께 고민하기 위한 글을 열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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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HcpgPSm49Yg
사건사고로 이전의 사건사고를 덮는 시절이라 그런지 정부 정책과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말과 글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출연하는 단골 배우가 있다. ‘전문가’다. 원전 오염수가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는 뉴스에서도, 의사를 늘리면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하는 뉴스에서도 전문가는 끊임없이 호출된다. 그렇다면 세상은 왜 그들의 의견을 열심히 묻는가? 복잡한 사안을 이해함으로써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같이 살피고 결정하기 위해서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 위한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기술적으로 복잡하고, 불확실성이 높은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곤 한다.
하지만 작금의 전문가들은 마치 세상을 다스리며, "가련한 사람들을 돕는" 임무라도 받은 양 행동한다. 2009년에 개봉한 영화 <전우치>에서 전우치는 '도사'를 "마치 바람을 다스리고 마른 하늘에 비를 내리고, 땅을 접어 달리"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전문가들은 정말로 자신이 도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 키워져, 때로는 지지를, 또 때로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전문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엇나가는 세상을 교정해야 한다고 외치다가, 현실에서 자신의 전능하지 않음을 깨닫고 세상을 원망하는 ‘도사’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전문가’를 찾는 정부와 언론의 시각, 그리고 그 뒤에 놓여있는 시민의 시각조차도 썩 개운치는 않다. 사람들은 전문가의 전문성을 통해 문제를 더 잘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조정하려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자신의 입장에 맞는 전문가의 말은 취사선택하고, 반대되는 말에는 화를 내곤 한다. 이런 모습을 두고 또 다른 전문가들은 정치적 양극화가 문제라거나, 공론장의 질이 나빠서라거나, 사람들이 과학적이지 않아서 그렇다는 둥 각자의 마음 속에 소중하게 모셔 놓은 보물을 꺼내 비장하게 사회의 ‘질병’에 진단명을 붙이곤 한다. 그러는 사이에 전문가가 독점한 사회진단의 권력은 금방 처방을 독점하는 온당한 명분이 되어버린다.
여기에 한국 사회에서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 질문이 있다. 바로 전문가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회의 여러 문제가 충분히 민주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문제를 짚는 전문가들은 그에 앞서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전문가는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선출되는 대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전문가는 그렇게 손쉽게 사람들의 삶을 크게 바꿔 놓을 수 있는 결정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또, 사람들은 도대체 왜 전문가가 그런 큰 힘을 가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가?
전문가도, 그 전문가의 입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사람도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전문가는 천하를 가르는 영향력을 행사해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도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특정한 형태의 지식을 배우고 익힌 동료시민이라는 사실이다. 시민이기를 거부하는 전문가, 전문가에게 시민됨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에서 전문가들은 시민 위에 군림하는 가짜 ‘도사’가 되곤 한다. 품위 없게 선동이나 괴담 같은 표현까지는 쓰지 않더라도, 전문가들의 말 뒤에는 흔히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진심이 놓여 있다. 작금의 여러 사정들을 지켜보노라면 그 말은 이렇게 돌려줘야 할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전문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다. 하지만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들도 많이 있다. 전문가들의 문제를 짚는 이런 이야기도 전혀 새롭지 않다. 우리는 사회가, 그리고 전문가가 지식을 더 많이 가진 시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내 삶을 결정하는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규범적 당위를 내세우기에 우리 ‘시민’의 삶은 너무 바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누군가 대신 해줄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들의 말처럼 전문가를 믿고 맡겨 두면 우리네 삶이 나아질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도무지 낙관하기 어렵다. 시민이 만들어낸 대화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숙고와 합의를 다시금 얘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