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펜을 잡으면 불평등한 세상에 대해 뭐든지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착각 속에서 코로나19가 터졌고 불평등한 현실을 기술하는 일조차 수많은 장벽을 넘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어디서 누가 뭘 하다 집단감염이 일어났다더라 하는 기사는 팔려도 가까이서 진단조차 못 받고 숨진 사람들 이야기는 다룰 능력이 없었던 한국 담론장의 현주소 앞에서 글 쓰는 사람이라는 ‘명함’은 차라리 수치였다.
K-방역이니 지역사회 중심의 감염병 대응이니 공허한 구호가 난무하는 동안 불평등한 삶과 죽음에는 가속도가 붙었고 나는 공범이었다. 현실적인 여건과 현재의 상황을 내세운 다양한 핑계 속에서 매일 쏟아내는 말과 글은 권력이 이끄는대로 현장을 외면하거나 자본이 인도하는 안온한 방향을 헤멨다. 멍청하고 게을렀던, 그래서 나빴던 글이 누구의 이름으로 나갔던지 내 손을 떠난 원고를 다시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 글의 주인은 자본과 권력이었다. 감염병은 덜떨어진 글쟁이에게 네가 넘어서야 할 장벽의 이름이 자본과 권력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홀연히 떠났다.
감염병이 알려준 것처럼 불평등은 언제나 권력과 자본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마치 호남지역에 대한 혐오가 ’지역감정’이라는 기만적인 단어로 변모했던 어제처럼, 수많은 산업재해가 ‘경영혁신’ 이라는 핑계 뒤에 붙는 오늘처럼 지식과 담론은 권력과 자본의 편이었다. '구급차 뺑뺑이,' 혹은 '소아과 오픈런' 같은 단어가 지면과 화면에 난무하던 최근 1년간도 그랬다. 의사가, 병원이 없어서 짐을 싸 서울로 간다는 사람들의 울분이 지면을 채우고, 긴급한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 한복판에서도 응급실 스무 군데를 돌아야 했다던 고발도 화면에 등장했다. 그러나 관심은 항상 '구급차 뺑뺑이' 에 분통을 터트리는 환자들, 서울로 향하는 주민들에게만 주어졌다. 항상 그래왔기 때문일까. ‘뺑뺑이' 돌 응급실조차 없어 가장 가까운 시내 병원까지 구급차로 한시간을 달려가야 했던 장애 여성의 사연이나 '한국인의 밥상' 에 오를 명태 배 따는 일을 하다 감염병 시기가 되자 어떠한 돌봄과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사망한 어촌지역 이주노동자의 비극은 지면 한구석조차 차지하기 어려웠다. 사실 '뺑뺑이' 는 응급실이 많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며, '오픈런' 은 기꺼이 새벽부터 휴대폰 어플을 켜고 예약을 기다리다 생업을 제쳐두고 병원으로 뛰어갈 보호자가 있는 상황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은 지워졌다. 어떤 이의 고통은 지우고, 어떤 이의 서사에는 이입하는 서울 중산층의 공론장이다.
불행히도 지역언론조차 이 게으른 기억과 망각의 구조에 기꺼이 복무했다. 지역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불평등의 무게만큼이나 지역에서의 담론생산은 게을렀다. 병원이 밀집한 지역 거주자들이 구급차를 타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응급실을 도는 현상을 주류 미디어가 '구급차 뺑뺑이' 로 정의하자 응급실 찾기가 어려운 지역에서도 하나 둘 ‘뺑뺑이’를 돌았다는 뉴스가 복제품처럼 등장했다. 사실 지역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돌봐줄 이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홀로 ‘익숙한’ 불편과 고통을 견디다 조용히 세상을 떴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언론인도, 학술장도, 전문가도 주민의 삶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어쩌면 ‘지역’에게는 스스로를 대변하고 이 체계적인 불평등에 대항할 시각과 뚝심을 기를 기회와 권력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담론의 시계가 전국 어디서나 서울의 시각을 좇는 동안 주민들은 시외버스비 오천 원이 없어 고열에 시달리는 밤을, 장애인 자녀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전쟁 같은 병원길을, 정신건강 문제를 상담할 의사가 없어 뜬 눈으로 지새는 새벽을 맞이했다.
처참한 담론장을 두고 부정의를 부정의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지식을 돌아본다.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지역의 삶과 지식을 옭아매는 권력과 자본을 마주한다. ‘지역’ 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부상했다는 2023년 지금 여기, 한국사회가 찾아대는 '지역'은 주민의 삶에서 오히려 멀어져 간다. 주민의 삶을 들여다볼 의지도 능력도 없는 정보생산자들이 만들어낸 말과 글은 안온한 자본과 권력의 품을 배회한다. 다시, '지역' 의 관점으로, 이 억압과 고통을 공고히 하는 자본과 권력의 구조를 생각한다. 게으른 미디어, 주민의 삶에 관심 없는 학술장, 자본과 권력에 묶인 전문가. 지역의 억압과 고통을 공고히 하는 구조 속에 지역이 해방을 모색할 틈은 어디에 있을까. 담론의 홍수 속에서도 ‘지역’은 여전히 주민의 삶과 멀고 서울 중산층에 영합할 수 있을 만큼의 얄궂은 위치에 놓였는지 모른다. 그만큼 지식의 권력은 공고하고, 지역 내부에서조차 자본과 권력을 앞세워 지배담론의 공고한 막을 형성한다.
그래서 지금 지역과 불평등을 말하려는 이들이 맞서야 하는 권력은 '볼 수 없게,' '부를 수 없게' 하는 힘이다. 주요 대학 합격자 중 서울 출신 학생이 절반에 이르는 시대, 지식과 담론의 구조는 그 어느때보다 지역을 고립시키는 실질적인 억압의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이 스스로의 관점과 현장을 잃어가는 동안 몸도 마음도 서울 한복판을 떠나지 못한 채 지역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담론을 답습한다. 주민의 자리에서, 주민의 삶으로 ‘폭력적인 담론’ 을 목도하며 해방의 권력을 찾는다. 주민의 말, 주민의 글. 이 체계적인 불평등에서 지역을 자유롭게 할 해방의 권력은 주민의 삶 속에 이미 있다. 지역 사람의 시각으로 새 지도를 짜는 지난한 정치의 시간이 이미 시작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