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을 찾기 전 "내 증상은 경증이니 집에서 쉬자"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똑똑한' 환자는 누구일까요? HSC의 요번 주 글에서는 정부가 내어놓은 응급실 공익광고의 잘못된 전제를 짚습니다. 경증 환자가 중증응급환자에게 응급실을 양보하면, 응급실 이용을 '죽을 병이 아니면'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비싸게 만들어버리면 응급실 문제가 풀릴까요?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손수건을 들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할머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뒤이어 어딘가 아픈지 모를 젊은 여성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얼굴에 일회용밴드를 붙이고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든 채 들어오는 어린이도 보인다. 엘리베이터가 사람들로 꽉 차 갈 무렵, 마스크를 쓴 젊은 의료인이 여기저기 부러진 '중증응급환자'를 싣고 들어오려다 절망한 듯 멈춘다. 뒤이어 "더 위급한 환자를 위해, 대형병원 응급실은 양보해 주세요." 라는 나레이션이 흘러 나온다. 지난 추석 즈음 보건복지부와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가 내어놓은 공익광고의 한 장면이다( 🐳영상 바로가기).
이 광고는 경증환자 때문에 중증응급환자가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받기 어려우니 경증환자들이 ‘양보’하라는 요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중증인지 경증인지, 환자의 '중증도'를 판단할 지식과 책임을 가진 사람은 환자가 아닌 의사이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환자들은 급박하고, 걱정되는 상황 속에서 도움을 구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환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병이 얼마나 심각하고 급한 지에 대한 의학적 판단을 할 수 없다. 약간의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증상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에게 어떻게 찾아가야 적절한지 판단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은 의료인의 전문적인 판단과 서비스를 필요로 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환자’라고 부른다.
의사는 자신의 건강상태를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환자들을 치료한다. 이것은 병원에 가면 지식을 갖춘 의사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사회적 믿음의 전제다. 그래서 환자가 필요에 맞게 응급실과 진료과목을 찾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병원과 의사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모두 의사만큼 알아서 건강 문제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면 의사라는 전문직이나 병원이라는 공간이 지금처럼 중요하게 여겨질 까닭도 없기 때문이다.
<aside> 💡 만화 <일하는 세포>의 호중구 1146호. 근처에 세균이 있으면 모자에 달린 O자 표시판이 반응한다. 놀랍게도 환자에게는 자신의 질병이 중증응급이면 반응하는 표시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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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건강 문제의 대부분은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건강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와 이로 인한 다양한 필요가 있다. 이 필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해결에 적합한 방식으로 문제의 목록을 정리해 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아프다고 해서, 무슨 병에 걸렸는지 자동으로 표시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를 위해 만들어진 전문과목이 있다. 바로 일차의료(primary health care)다.
사람마다 조금씩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모든 사람이 동의할만한 일차의료의 핵심 속성은 ‘최초 접촉’, ‘포괄성’, ‘지속성’, ‘조정 역할’의 네 가지다. 환자가 어려움을 겪을 때 가장 먼저 만나서, 감기부터 관절염까지 한 사람이 겪는 건강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해 주고, 다음에 배가 아파서 찾아갔을 때도 연계해서 환자를 본다는 뜻이다. 집 가까이에서 만나는 일차의료 의사는 환자의 건강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해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의료 이용을 조정해 주는 역할도 맡게 된다.
환자와 오랜 기간 관계를 맺고서 대부분의 건강 필요를 해결해 주고, 필요한 경우에는 기술적으로 더 복잡한 치료를 받도록 조정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괜찮습니다. 약 먹고 쉬면 나아질 거에요.’ 관계가 잘 형성된 의사로부터 듣는 한 마디의 효과는 크다. 간단한 말이지만 그야말로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이 말 덕분에 환자는 안심할 수 있고, 불필요한 의료이용도 피할 수 있다. 일차의료의 전문성이자 효과다.
하지만 한국에 '일차의료' 를 하고 있다고 부를 만한 의원이나 병원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동네에는 의원이 많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의료체계 안에서 일차의료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은 아니다.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어린이와 보호자를 함께 만나고, 어린이가 성장하며 지속적으로 의사를 만난다는 진료과의 특성 때문에 일차의료의 성격을 피해가기 어렵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러가지 운영 상의 어려움 때문에 수가 줄어들고 있다.
환자들 입장에서 대형병원 응급실은 의원과 달리 일차의료가 갖추어야 할 특성을 대부분 제공한다. 응급실이 중증응급질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곳이기는 하지만, 일단 가면 대부분의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문제가 오래 가는 것이라면 그 병원에 설치된 진료과의 외래를 통해 계속해서 관리할 수도 있고, 어느 과 진료를 봐야 할지도 정해서 알려준다. 대형병원 응급실은 사실상 한국에는 없는 줄 알았던 일차의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의원 | 대형병원 응급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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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접촉 | 아플 때 처음 방문하는가? | 예 | 예 |
포괄성 | 대부분의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 대체로 아니오 | 대체로 예 |
지속성 |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건강 문제를 관리할 수 있는가? | 대체로 예 | 대체로 예 |
조정 역할 | 필요한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조정해 주는가? | 대체로 아니오 | 대체로 예 |
그렇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보건복지부와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가 내어놓은 공익광고는 꽤나 이상하다. 죽을 사람을 살려내는 것도 중요한 전문성이지만, 죽을 병이 아니라는 걸 구분할 수 있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전문성이다. 응급의학과에서 환자의 중증도 분류(triage)를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 판단이 전문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중증응급환자가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정말로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의사지 환자가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의사들조차도 ‘걸어서 들어와서 죽어서 나가는 환자’, 그러니까 경증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중증응급이었던 환자가 제일 무섭다고 말하는 판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