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의 진료 거부가 길어지면서 정부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사를 서울의 대학병원에 파견했다.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합리적인 정부라면 중요한 자원인 의료 인력을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죽을 수 있도록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합리적인 선택 뒤에는 언제나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의사를 뺏긴 지역들이 화를 냈고 그로 인해 바뀐 것은 없었다. 다만, 다행스러웠던 것은 평소와는 다르게 중앙 언론도 그 분노를 선뜻 기사로 받아 안았다는 정도.

불운하게도 세상에 다행스럽지 않은 일이 더 많아서 합리적인 선택은 사회, 조직, 가족을 가리지 않고 숨 쉬듯이 일어난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렵겠지만 OO 씨가 이것도 해줘야겠다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직장인이 있을까. 남편에게 집안일을 맡겨봐야 지시하고 관리하는 품이 더 든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를 위한 관리 노동을 할 여력이 없어 분노와 울분을 삭이는 아내를 모른 체하는 남편들도 나름의 합리적인 결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나면 합리적 선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절에는 요양병원 앞에 ‘감염병 전담’이라는 다섯 글자를 붙이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환자 수십 명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나곤 했다. 의사들의 진료 거부로 병원에 가기가 어려워진 시절의 지역에는 병원에 가야 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모른 채 ‘위중한 환자에 의료 서비스를 양보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명분과 대의를 말하며 선택하는 이들은 그런 피해는 몰라도 되는 듯 계속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런 피해가 있다고 누군가 말하면 ‘우리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라든지,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다’ 같은 말이 돌아오곤 한다. 나랏일 하시는 귀한 분들의 사정이 있겠지만, 사정을 말할 수 있는 것도, 고통을 호소할 수 있는 것도 하나같이 목소리와 자리가 있어야 가능한 현실이 서글프다. 가끔 귀하신 분들이 불운하게도 피해를 겪는 위치에 가게 되어도, 피해를 만드는 구조를 바꾸는 대신 세상의 모든 고통이 나에게만 쏟아지는 양 울부짖고, 끼리끼리 그 아픔을 위무하느라 바쁘다.

미국 드라마 <아담스 패밀리>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마리 앙투아네트 인형을 달라고 말하는 리사 로링(아담스 웬즈데이 役)

미국 드라마 <아담스 패밀리>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마리 앙투아네트 인형을 달라고 말하는 리사 로링(아담스 웬즈데이 役)

합리적 선택은 미래의 약한 이에게 가하는 폭력이기도 하다. 미시적 합리성을 정신없이 쫓다 보면 약한 이는 더 약해지고, 약하기 때문에 온당한 몫을 받을 수 없다는 증거만 켜켜이 쌓여간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성병을 더 많이 앓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을 고려하고 나면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겪은 코로나19 유행의 건강 피해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은 과학과 합리의 언어로 얼룩 같은 불평등을 닦아낸다.

구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잘 바뀌지 않고 사회의 많은 부분을 규정한다. 그래서 구조다. 구조 위에 있는 사람은 악의가 없어도, 때로는 선의로 가득 차 있어서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차량을 운전하고 있는 사람의 ‘미처 못 봤다’라는 말이 교통사고에 면죄부를 주지 못하듯, 구조 위에서 큰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몰랐다’ 혹은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폭력의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이유는 삶의 경로로 권력을 쥐었을 때의 모습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유능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일은 권력을 휘둘러 내릴 수 있는 결단이 아니라, 힘에 걸맞은 책임을 지는 지독히 외롭고 부담스러운 일이어야 마땅하다. 안타깝게도 책임은 조금도 지지 않은 채 모두가 힘만 휘두르고 싶어 하는 시절이 된 지 오래다. 무망한 바람이지만,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만 두는 대신 티끌만 한 책임일지라도 감히 받아안으려는 사람됨의 회복을 기대한다.

<aside> 💡 선동을 넘어 합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어느 때보다도 넘쳐나는 때입니다. 어떤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나면 다 괜찮은 걸까요? 합리적 ‘선택’이 만들어 내고, 은폐하는 고통과 그에 대한 책임을 모두에게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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