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서울대학교병원이 1년 동안 출판한 논문의 숫자가 서울대학교 전체가 쓴 논문의 숫자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임상의학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논문을 출판하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최근 시작된 전공의 파업으로 진료 뿐만 아니라 병원의 학술활동도 함께 위기를 맞았습니다. 화려한 연구 실적 뒤에 가려진 병원노동자들의 노동과 이를 유지하는 구조를 폭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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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병원은 엄청난 수의 논문을 생산한다. 2019년 기준 서울대병원은 3,000여 편에 달하는 SCI 논문을 냈다 [1]. 비슷한 시기 서울대학교 전체가 낸 SCI 논문 2000여편보다도 많은, 엄청난 숫자다 [2]. 환자만 보기도 바쁜 의사들이 전업 연구자보다 더 많은 논문을 낸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다른 대학의 현황도 비슷하다. 임상의학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논문을 배출하는 분야로 2019년을 기준으로 1만 3,000여 편의 논문이 출판되었다. 이는 두 번째로 많은 논문을 출판하는 분야보다 3,000여 편이 더 많은 숫자이다 [3].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전공의들은 올 2월 19일부터 두 달이 다 되도록 병원을 비우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환자들의 어려움, 시민들이 입는 피해, 그리고 병원이 호소하는 경영난 이외에도 이로 인한 어려움이 발생한 곳이 있다. 교수사회다. 교수들은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병원들이 종전처럼 연구를 진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심지어는 이에 대한 대책과 책임을 정부가 져야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체 병원은 어떤 식으로 논문을 써왔기에 전공의 파업이 진료 뿐만 아니라 연구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일까? 하지만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의 과정을 생각하면 이런 하소연이 교수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대학병원의 복도와 엘리베이터에는 소속 교수의 연구 실적을 알리는 홍보물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병원 교수는 진료, 교육, 그리고 연구를 통해 평가받고 임용된다. 이 중 중요한 것은 단연코 연구다. 대학병원에서는 모두가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으므로 진료에서 차이가 나긴 어렵고 교육은 늘 뒷전이다. 때문에 환자들에게 알려진 대학 병원의 명의도 사실은 진료보다는 연구를 잘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임상연구의 꽃은 임상시험이므로 큰 병원에서 대규모 임상시험을 운영하는 연구자는 온갖 명예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명예’를 차지하는 이들이 상응하는 노동도 자처하고 있을까? 한국은 위장관 복강경 수술에 대한 연구가 아주 활발한 국가다. 복강경 수술은 복부를 완전히 절개하는 대신 (개복수술) 몇 개의 구멍을 뚫고, 구멍을 통해 가느다란 카메라와 수술기구를 넣어 진행하는 수술이다. 개복수술에 비해 절개범위가 작아 통증이 적고 회복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우연히도 학생 시절 연구의 일부를 엿볼 기회가 있었다.
하루는 수술을 참관하는데 수술을 집도하는 교수가 수술을 보조하는 전공의에게 30분 넘게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수술자는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일까? 길게 이어진 호통에는 여러 이야기가 섞여 있었지만, 중요한 것만 남기자면 전공의가 출혈량을 기록할 때 함부로 반올림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소중한 연구 자료가 너 때문에 잘못됐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수술 중에 발생하는 출혈은 수술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연구 책임자가 연구 자료를 직접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노동을 전공의가 대신한다는 것이다.
전공의는 왜 숫자를 그대로 입력하지 않고 반올림을 했던 것일까? 당시에 학생이었던 나는 전공의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의학 연구는 환자의 방대한 의무기록을 의사가 하나씩 확인하고 요약하는 과정을 거친다.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로서 한 병원에서 다른 병원으로 진료기록을 옮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록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 것이다. 한 명의 기록을 요약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기록을 정리하는 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다. 여기에는 출혈량 외에도 수술시간이나 경과와 같은 많은 정보가 포함돼 있다. 진료를 포함한 다른 업무도 병행하는 전공의 입장에서 상당한 양의 추가업무다. 그러다 보면 수치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조금은 대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수 있다.
수많은 자료를 일일이 보고 요약하는 작업은 임상 연구의 근간이지만 현실에서 이 노동은 불공평하게 부과되고 노동의 과실 역시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큰 병원들은 환자들이 자신들에게 집중되는 점을 십분 활용하여 임상자료를 구축하고 학술활동의 근거로 삼는다. 한국에서 대학병원의 교수들이 이렇게 많은 숫자의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건 전공의가 의사로서 교수가 해야 하는 일 중 상당수를 나누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잠재적 연구 참여자인 환자 수를 늘릴 수 있는 것도, 의무 기록에서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추출하여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전공의 덕분이다. 전공의특별법은 전공의의 수련시간을 법적으로 규제하지만, 수련이 무엇인지 정해진 것이 없어 연구 활동에 쓰는 시간을 수련에 포함시킬지는 병원 마음대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활동은 진료행위가 아니라 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병원에서 임금을 따로 지급하지도 않는다.
잘 드러나지도 않지만 더욱 문제적인 것은 연구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학원을 다니는 데만 전념하는 전일제 대학원생이 성심성의껏 가르치는 교수에게 배워도 연구를 설계하고 논문을 작성하는 역량을 기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든다. 하물며 그렇게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당직까지 서면서 연구 역량까지 기를 수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병원에서 의사부족과 인력부족에 대한 호소가 쟁쟁했던 걸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결과적으로 대부분 병원은 전공의가 좋은 연구자가 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는 데에 실패한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은 전공의들이 임상 논문이 만들어지는 생산라인의 부품으로 활용되는 데에 가깝다. 성실하게 역할을 했다고 해서 논문 저자 참여 같은 비금전적 보상이 온전히 주어지는 지도 확실치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 사람의 온전한 연구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거대한 생산라인의 일부가 되는 것이 질적으로 더 나은 논문을 출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논문생산라인의 부품이 되지 못한 전공의들도 연구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한국은 특이하게도 등재 학술지에 제1저자로 논문을 게재해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이 규정은 의학연구가 고도로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4, 5]. 그러나 열악한 병원 환경 속에서 이 규정은 자연스럽게 요식행위로 전락했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전공의가 생산라인 밖에서 진행한 연구는 당연히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에는 임상학회들이 운영하는 수많은 학술지가 존재하고, 이 학술지들은 항상 지면을 채워줄 전공의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공급된 병상은 반드시 채워진다는 뢰머의 법칙처럼 공급된 학술지 지면은 채워진다 [6]. 그렇게 전공의는 전문의가 되어 병원을 떠난다.
수련 과정에서 이뤄지는 이 부당함과 착취적 관계를 두고 병원의 목표를 생각해본다. 환자는 병원에 '좋은 의료'를 기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 홍보물을 장식하는 문구 역시 치료에 최선을 다하겠노라, 좋은 의료를 제공하겠노라 하는 약속이다. 대학병원에서 연구가 이뤄지는 당위 역시 진료를 더 잘하기 위한 근거를 만드는 데 있다. 때문에 지금의 대학병원은 주객이 전도됐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병원은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기보다 그들을 연구를 위한 자료로 여기고, 병원 노동자는 연구를 위해 부당한 노동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시스템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교수들도 진료와 연구의 이중부담으로 여러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많은 병원이 멈춰섰다. 환자들은 고통과 불안을 호소한다. 이 때 병원이 환자에게 제공해야 할 최선을 다시 생각한다. 진료를 '더'잘 하기 위한 연구보다는 진료를 우선으로 하고, 무언가를 멈춰야 한다면 진료보다는 연구를 먼저 멈추는 게 환자와 의사 모두를 위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