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의대 증원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반복해서 듣게 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원점 재검토”라는 표현입니다.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정책을 다시 찬찬히 살피자는 주장은 언뜻 보기에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일을 살피면 생각은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랜 반대의 역사를 제쳐놓고 사회적 합의가 부족했으니 다시 협의해야 한다고 말하는 일은 왜 문제일까요? HSC의 이번 글에서는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니 의대 증원을 원점 재검토하자는 주장을 재검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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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진료 거부 정국이 세 달 째에 접어들고 있다. 정부는 의사와 의대생들을 향해 의대 정원 증원과 관련한 의료계의 ‘단일 안’을 제시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의사와 의대생들은 이 안을 만드는 데 계속해서 실패했다. 결국 느슨한 의견의 일치조차 원점재검토, 즉 정책의 중단을 의미하는 선택지까지 후퇴한 끝에야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관련 기사: 대통령 '의료계 통일안' 요구에 의사들 "원점 재검토가 통일안"). ‘원점재검토’는 2020년 의정 합의문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서 깊은 표현이다.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합의문에도 ‘원점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재논의’한다는 표현이 나온다(☞관련 기사: 與-의협 "의대 증원·공공의대 원점 재논의"…합의문 서명(종합)). 논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실 누구나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다.

하지만, 이 주장이 타당한지는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큰 규모의 정책을 추진할 때는 흔히 각계의 사람들이 너르게 참여하는 소위 ‘사회적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이야기를 들어봤다는 모양새를 내서 정치적 반발을 줄이기 위한 요식 행위에 가깝고, 보통 사람들을 그다지 대표하지 않는 사람들로 채워진다는 문제가 다시 생기곤 한다. 하지만 연금개혁 공론화 위원회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공적 결정이 필요한 의제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의미 있는 시도임은 틀림이 없다.

보건의료 영역에서는 건강보험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줄여서 건정심)가 이런 사회적 대화의 틀에 형식적으로 가장 가깝다. 법적으로는 상위기구에 해당하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도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건정심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진다. 건정심에는 공급자:수요자:공익 대표가 동일한 비율로 참가한다. 그러나 공익 대표로는 정부 혹은 공공기관 소속이거나 정부가 추천한 전문가가 흔히 위촉된다. 사회적 합의를 지향하는 기구임은 분명하나, 보통 사람들이 대변되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구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건정심의 구조에 불만을 가진 의사들은 의사와 정부가 1:1로 대화하는 소위 ‘의정 협의’를 요구하고, 그게 아니면 의사가 절반을 차지하도록 건정심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의료의 현장을 담당하는 의료전문가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 더 많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온 셈이다.

원점재검토로 완성되는 펜로즈의 계단. 원점재검토를 주장하는 일은 반대하는 의제 자체를 정책의 대상으로 다루지 못하게 억압하는 일이 된다.

원점재검토로 완성되는 펜로즈의 계단. 원점재검토를 주장하는 일은 반대하는 의제 자체를 정책의 대상으로 다루지 못하게 억압하는 일이 된다.

원래도 보건의료 영역의 ‘사회적 대화’는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의사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더 민주적이지 않고, 더 폐쇄적인 방식의 ‘의정 협의’로 대화의 양식을 바꾸고 나면 최소한의 개방성도 사라지고 만다. 최근의 회의록 논란(☞ 관련 기사: "의료현안협의체 회의록 안남겼다"는 정부…공세 높이는 의료계)에서도 알 수 있듯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알 방도가 없고, 안 그래도 먹고 사는 일로 바쁜 사람들은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 빠진다. 논의의 존재와 내용을 모르는 건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관련 기사: [단독] 의정협의 시작부터 파국까지…의협 내부 보고문건 입수). 정부가 오랜 기간 일부 의사들과 협의를 진행했다고 할지라도 그 협의는 시민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나, 의사들조차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나 ‘사회적 대화’는 아닌 셈이다.

시간이 지나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는 시점이 되면 다시금 ‘사회적 논의’가 부족했다는 주장과 함께 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친다. 사회적 대화를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논의 내용은커녕 의사와 정부가 무언가 중요한 내용을 논의했다는 사실조차 알 수가 없다. 판단할 근거가 없어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며 의견이 분분한 사이 의사들의 반발이 거세지면 어떻게 되는가? 정책결정자가 현직 대통령처럼 불통이 대단한 분이 아니라면, 달리 말해 사회적 압력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정부라면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다시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의정 협의의 길로 들어서는 것 외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이렇게 정책의 추진 자체를 끊임없이 무력화하는 의사 집단의 대전략이 완성된다.

오는 6월 제22대 국회가 개원하면 진료 거부를 막는 법률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의사 표현을 사람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도록 울타리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있다. 의료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가능하게 만들고,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내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분야, 다양한 단위에서 미래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의견을 묻고, 같이 생각한 끝에 결론을 도출해 본 경험이 쌓여 가고 있다(☞ 관련 기사: 연금개혁 공론화위 결론은 "'더 내고 더 받는 안' 선호 우세"(종합), 제주 '중학교 남녀공학 전환' 교육공동체 의견 듣는다).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방식은 언제나 만족스럽기 어렵고, 사람들의 의견에서 출발해 집행할 수 있는 정책까지 가는 길도 매우 멀지만 시도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원점재검토’란 이름의 악순환을 ‘재검토’할 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