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농민들이 파종을 시작할 무렵이면 의무감을 가지고 쓰는 글이 있다. 열이 나고 배가 아픈 증상에서 시작한 뒤 단기간에 여러 장기가 망가지기까지 하는 감염병,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을 옮기는 진드기가 늘어나는 계절이니, 농작업 후 꼭 샤워를 잘하고 열이 나거든 병원에 가시라는 안내문이다.

도시 사람들에게는 '살인 진드기' 같은 괴담으로만 소비되는 질환일지 몰라도, 해충으로 야기되는 감염병은 농촌지역 주민들의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다. 2023년 질병관리청 집계 기준 전국 사망자가 38명이고, 이 중 10명이 경북에서, 7명이 전남 지역에서 발생한 사망이니 이보다 더 명백한 불평등을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어디 ‘사망률’이라는 숫자로 단순화할 수 있겠는가. 의료 인프라가 매우 나쁜 지역에서 일하며 고백하건대, 열이 나고 아파하던 주민들이 진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숨진 사례도 농·어촌지역에는 여전히 상당수다. 상대적으로 사망자 수가 적은 지역이라고 할지라도 이 감염병을 심각한 공중보건, 그리고 불평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23년 광역지방자치단체별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 인구 10만명당 발생률. 농·어촌지역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높은 발생률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사망률로 나타내지 않더라도 질병에 노출되고, 주민들이 고통을 겪는 그 과정 자체에 심각한 불평등이 숨겨져 있다.

2023년 광역지방자치단체별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 인구 10만명당 발생률. 농·어촌지역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높은 발생률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사망률로 나타내지 않더라도 질병에 노출되고, 주민들이 고통을 겪는 그 과정 자체에 심각한 불평등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엄연한 지역의 현실을 두고도 해결책은 제자리걸음을 걷는다. 손을 잘 씻고, 농작업을 할 때는 긴 소매의 옷을 입고, 다녀온 뒤에는 샤워를 잘하라는 안내문을 매 시기 쓰지만 사실 알고 있다. 이런 노력은 주민들의 건강을 돌볼 사회적 자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저 언 발에 오줌 누듯 하는 의례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이다.

농촌에서 ‘농업’을 하지 말라니요

자아비판이지만 '안내문'이 요구하는 바는 상당 부분 기만적이다. 방역당국에서 나오는 자료를 보면 더욱 그렇다.

"SFTS는 예방 백신과 치료제가 없어 진드기에 물리지 않도록 예방수칙 준수" "의료진은 4~11월 동안 발열 환자 내원 시 농작업 등 야외활동 확인하여 SFTS 검사 실시"

전자는 일단 농촌지역에서는 불가능한 일. 예방수칙을 준수한다고 하더라도 한여름 잡초가 쑥쑥 자라나는 농촌 밭 한 가운데서 온몸을 완벽하게 감싸매고 김을 맬 수는 없다. 더욱이 진드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일수록 지역 산업의 상당한 비중이 농업에 집중돼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농업은 고령 주민들이 살아온 방식이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노동이다. 굳이 돈을 벌고자 하는 노동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지역의 삶의 양식이자 문화이자, 주민들 생의 일부라는 말이다.

후자 역시 '아직'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일이다. 검사는 둘째 치고, 주민들은 아프고 열이 날 때 적절한 의료기관을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열이 나도 병원을 가지 못한 채 며칠씩 앓고, 겨우 찾아간 인근 도심의 이비인후과에서도 진단받지 못하고, 결국 중증이 된 채로 집에서 세 시간이나 걸리는 상급종합병원에 실려 간 뒤에야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된 의료취약지의 고령층. '한국에서 병원 못 가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할 상황이겠으나 오늘도 농촌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더욱이 건강한 사람들이야 그냥 앓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고령층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 감염병은 지역과 연령이 겹치는, 교차적인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심화된다.

손 씻고 싶어도, 상수도가 없다면

‘예방수칙을 준수’하는 일의 복잡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는 ‘사회적 동물’인 이상, 손을 씻는 일 하나에도 권력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손을 씻을 수 있도록 상수도를 배치하는 국가권력의 힘, 공공장소의 수도에는 비누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회권력의 힘이 그것이다. 인간이 손을 씻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 30초를 내놓을 수 있게끔 만드는 힘도 인간 삶의 양식을 결정짓는 권력에서 기인한다. ‘비누로 손을 잘 씻으세요’ 한 마디의 예방수칙을 준수하는데도 수많은 권력이 개입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모든 감염병의 예방수칙으로 불리는 ‘손 잘 씻기’를 두고도 수많은 불평등이 교차한다. 2022년 환경부 통계 기준 한국의 상수도 보급률은 99.2%, 얼핏 봐서는 거의 모든 지역에 상수도가 보급돼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이는 국가라는 공동체가 주는 착각이다. 수도권으로 분류되는 서울, 경기, 인천의 상수도 보급률은 100%지만, 서울에 수자원을 공급하는 강원도의 상수도 보급률은 95.9%. 그러니까, 4.1%의 사람들이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는 지역에 산다. 다른 지역의 농촌에도 비슷한 사정을 가진 지역이 여럿 있다. 매년 가뭄이 드는 봄·여름철 단수가 되고, 마을 사람들이 생활용수를 근근이 배급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30초, 물과 비누로 손씻기’가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서울에도 여전히 공공시설이 부족하다며 자꾸 새 건물이 들어서는 동안, 서울에 모든 자원을 내어준 채 매년 가뭄마다 고통받는 농촌지역 주민들의 아픔은 매년 깊어만 간다.

시민의 삶과 온존은 어디에

한국은 코로나19를 성공적으로 통제한 국가로 분류된다. 코로나19가 사회적인 위기로 인식되자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며 백신이며, 치료제가 수시로 등장했고, 약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치 그런 위기가 없었던 양 이전의 '일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난리 통 속에서 모두가 눈감은 문제는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으로, 식중독으로, 때로는 인플루엔자로 되살아나 기억과 망각의 불평등을 조망한다. 사는 곳과 소득과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존엄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권리가 그 불평등 속에 그림자처럼 놓여 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의 아픔과 죽음은 ‘예방수칙 준수’라는 허울뿐인 안내로 해결되지 않는, 권력적 착취의 결과다.

'예방수칙을 준수하세요,' '아프면 검사를 받으세요,' 현실을 뒤로 한 채 코로나19가 남긴, 건강과 죽음에 대한 정치적 질문은 그저 각자도생의 논리로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 착취와 불평등의 구조는 남겨둔 채 ‘각자도생’의 메시지 하나면 국가의 정치적 책임이 모두 면피 되는 듯한 이 상황이 나는 정말로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