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불평등은 어디에서 올까요? 큰 힘을 가진 나쁜 사람들이 세상을 망친 결과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번 글에서는 인식을 실제 차이로 바꿔놓음으로써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통계적 차별을 설명하고, 그 구조 안에서 우리 모두가 불평등을 만드는 주체라는 사실을 다룹니다. 일상에서의 실천은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재생산되고 있는 불평등의 고리를 끊는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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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우리의 책임에 대하여

옛날에 어느 작은 회사에 지원한 적이 있었다. 늦어도 2주면 결과가 나오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좀처럼 결과가 나오질 않았다. 같이 면접을 봤던 다른 지원자에게 물어보니 그 사람한테는 이미 합격 통보가 갔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인사담당자한테 연락해 보니 아직 결정이 되지 않았다는 답만 두세 번 돌아올 뿐이었다.

물어물어 뒷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마침 나와 비슷한 스펙을 가진 사람이 들어왔다가 금방 그만뒀고, 또 그만둘지 모르니 뽑을지 말지 고민하느라 결정이 늦어졌다는 일화였다. 나중에 공부를 좀 더 하고 나서 돌이켜 보니 만약 이렇게 해서 탈락했다면 전형적인 통계적 차별이었다. 경제 주체(소비자, 근로자, 고용주 등)가 관계를 맺는 개인에 대한 정보를 완전하게 알고 있지 못할 때,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평균적 특성에 기반하여 개인을 판단하는 것, ‘통계적 차별’의 의미다. 이미 발에 채도록 흔하게 개인의 실제 능력과 관계없이 명문대 출신, 군필처럼 속해있는 집단의 속성에 따라 채용과 선발이 이뤄진다. 차별의 짝이 되는 특권을 누렸다는 사실은 인지조차 어렵다. 다만 명시적으로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 대단한 특권을 누렸다는 점만이 명백하다.

언뜻 보기에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 방식처럼 보이는 통계적 차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뭘까?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쪽이 그 권력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게 학교든 기업이든 간에 우월한 지위에 있는 쪽에서는 지원자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대신 눈에 잘 보이는 몇 가지 특성으로 판단하여 편리한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로 인해 좋은 사람을 놓치면 물론 학교와 기업에도 피해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피해는 눈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손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반면, 지원자는 무성의한 결정의 결과로 부당하게 탈락하게 되는 셈이니, 그 피해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기업의 채용은 워낙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에 그래도 사회적 관심을 받는 편이다. 최근에는 성차별을 중심으로 통계적 차별을 찾아내고 교정하려는 노력도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통계적 차별이 꼭 채용과 선발에서의 차별로만 존재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누구나 갖고 있는 암묵적 편견은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통계적 차별로 손쉽게 이어진다.

일상에서 그런 차별이 차곡차곡 쌓이면 통계적 차별은 단지 사람들이 가진 편견과 인상 때문에 발생하는 인지 편향(cognitive bias)이 아니라 실재하는 ‘차이’가 된다. 여자들은 참을성이 부족해서 어려운 일을 맡기면 금방 포기한다는 통계적 차별을 내버려두면 어렵지만 그래서 인정받고, 승진할 법한 직무를 맡은 사람은 남성 일색이 되기 마련이다. 그 결과는 여성 관리자를 뽑기에는 관리자급으로 승진할 만한 여자 직원이 없다는, 쉽게 들을 수 있는 차별의 정당화이다. 성차별(sexism), 인종차별(racism) 등 사회에 존재하는 주요한 차별들이 모두 그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지금처럼 광범위한 차별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차별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만 한 권력 차이도 큰 차이로 키워내는 권력의 작동이 과학인 셈이다.

Toby Morris의 <The Pencilsword: On a plate>(☞바로가기). 한국에는 <특권에 대한 짧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좋은 부모의 도움이 아니라 통계적 차별이 축적된 결과로 ‘성공’한 사람은 한층 더 강고하게 ‘평생 아무것도 거저 받은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Toby Morris의 <The Pencilsword: On a plate>(☞바로가기). 한국에는 <특권에 대한 짧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좋은 부모의 도움이 아니라 통계적 차별이 축적된 결과로 ‘성공’한 사람은 한층 더 강고하게 ‘평생 아무것도 거저 받은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통계적 차별이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 문제에 관심을 둘 이유가 지금처럼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이 어디에나 있는 탓에 통계적 차별도 어디에나 있다. 앞에서 얘기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바꿔서 써보자.

옛날에 정부 지원금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 좀처럼 결과가 나오지 않아 담당자에게 연락해 보니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답만 두세 번 돌아올 뿐이었다. 한 달 반이 넘게 지나서야 지원금이 나왔지만, 그 사이 지원금 조건을 유지하느라 다른 곳에 취업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나중에 물어물어 알게 된 건 그해 마침 지원금 부정수급 사례가 발각되어 지원금을 유지할지 말지 결정하느라 선정이 늦어졌다는 웃지 못할 뒷이야기였다.

회사가 정부로, 권력의 원천이 선발에서 지원금으로 바뀌었을 뿐 구조는 별반 다르지 않다. 저런 우스운 의사결정을 한 사람들은 자신이 차별을 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지점까지.

더 큰 힘을 가진 사람들이 더 큰 차별과 더 큰 불평등을 만들기야 하겠지만, 누구나 차별을 하고, 누구나 실현된 불평등에 대해 일정한 책임이 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스스로에게는 면죄부를 준다. 기후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불건강하고, 불공정하며, 환경 파괴적인 생산과 소비를 부추기는 이른바 소비촉발체제(consumptagenic system)에 기여하는 나의 삶을 바꾸는 일이 필요하지만, 흔히 탄소 악당이라고 불리는 외국의 유명 인사를 지목하는 데서 그치곤 한다(☞관련 기사: 택시 타듯 전용기 날리는 슈퍼 부자들이 기후를 망친다). 그러나 불똥이 튀지 않을 안전한 거리에 있는 다른 불평등을 말하는 대신, 내 삶과 연루된, 내가 기여하는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에 좀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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