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세요? 요즘 역대급 ㅇㅇ라는데 조심하세요. 기후위기, 자연재해, 전쟁과 군사갈등, 물가상승, 금융범죄, 무엇이든 빈칸을 채워도 어색하지 않다. 폭염에 힘입어 역대급 물폭탄으로 무장했다는 장마전선은 전국을 강타하고, 북에서는 오물폭탄과 미사일을 쉼 없이 쏘아 보내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우렁차게 울리는 재난문자의 비상음도 일상이 되어간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는 지금, 사방엔 폭탄이 도사리고 있다.
관리가 허술하거나 미처 손쓰지 못한 폭탄들은 불발에 그치지 않는다. 제주도의 침수, 화성의 화재, 부동산과 주식에 관한 사기 등 다양한 피해 소식을 전하는 속보가 넘쳐 난다. 하지만 자극적인 장면 위주로 편집된 15초, 30초짜리 동영상이나 가성비 갑 필수템 추천영상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이미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진지한 조언과 반성에 익숙해져 있지 않나.
하지만 오늘날 생명과 안전을 담보한 폭탄돌림은 각개전투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따지자면 온 세계가 참여하는 단체전에 가깝다.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코로나19 유행을 떠올려보자.
돌발퀘스트를 깨듯 그때그때 학습한 바이러스나 RNA백신에 대한 지식은 흐릿해진지 오래다. 하지만 단체석의 이용과 대중교통 막차시간이 제한되자 자연스럽게 모임약속이 줄어든 경험, 재난지원금으로 냉장고를 가득 채웠던 소소하지만 확실했던 행복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전파경로를 차단하려는 전투적인 조치들이 법제도에 숨겨진 독소조항과 결합해 실직, 폐업, 부채, 고립 같은 1인분의 재난으로 덮쳐오던 사례들은 상병수당(이전글 참고) 제도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여전히 이야기되지 못한, 해결하지 못한 숙제들도 산재해 있다. 정책이 사회적으로 큰 비용을 치르거나 사람들을 더 불평등하게 만들지 않도록 재난 풀이법은 끊임없이 고쳐 써야 한다. 현장과 당사자를 찾아가거나 기존 지식과 씨름하며 숙제를 공략하는 것은 연구자의 몫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떠나간 자리, 어쩌면 관심이 주어진 적 없는 척박한 분야를 파고드는 일은 쉽지 않다.
전 세계에 K-유행을 선도하는 한국이지만, 보건의료 분야 학술공동체는 학계의 관행과 고전 지식을 지키는 신사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이 신사들은 전공이 아니면 함부로 말을 얹지 않는 법이라 의대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도 의료인력 수급이라는 틀에 가두고 관망한다. 후학을 육성하고 학계를 끌어 나가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으로 분통을 터뜨린 쪽은 오히려 그나마 연구자로 살아가는 게 가능했던 이공계 대학이었다.
세계적으로는 어떨까. 이미 전 세계에서는 재난대응과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학제적 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근거를 생산하고, 확산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업으로 삼은 연구자들은 코로나19, 기후위기, 국가 간 갈등을 지구보건(Planetary Health)과 원헬스(One Health)의 틀 안에서 풀어내고 있다. 재난에 대한 대비와 대응을 위한 학제 간 협업과 공동연구는 이를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다. 건강연구(Health Science)는 본래 병원을 짓는 토목건설부터 약학, 병리병태학, 법학, 정치외교학, 행정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 다양한 전공의 응용과 융합을 기반으로 발전한 분야였다. 인간이 온 지구를 정복한 지금, 건강연구의 주제가 동물과 지구환경으로 확장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연구범위의 확장만큼 중요한 것은 연구를 수행하는 체계와 과정에서 얼마나 다양성과 포용성을 확보하였는가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국립보건원을 비롯해 연구과제를 공모하고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관들은 젠더, 장애, 출신국가에 따른 차별이 없도록 방지하는 차원을 넘어 중저소득 국가에 대한 연구를 해당 지역 출신 연구자들이 수행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학술행사에서 발표자와 토론자의 성비 균형을 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