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지난 1일 서울 시청역 앞에서 발생한 역주행 사망사고는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하지만 이 충격이 여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개운치 않습니다. 뉴스에도, 밥상머리에도 '고령 운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이 참사 앞에서 '노인'이 불려나오는 상황은 온당한가요? 장애인을 만드는 요인은 '장애'가 아니라 '사회'인 것처럼, '노인'을 비난하는 사회 역시 연령차별에 찌든 사회일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사고'를 만든 진짜 범인을 찾아 나서 봅시다. '아픈 몸도 행복한 사회'를 필사적으로 막는 그 누군가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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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시청역 인근에서 차량이 역주행, 보행자 9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최근 곳곳에서 사회적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이 사고는 또다시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재발 방지에 대한 논의도 여러 군데서 나왔다. 하지만 참사를 두고 논의하는 한국사회의 말들에는 교차적인 혐오와 불평등이 비수처럼 숨어 있다.

사고, 혐오를 깨우다

사고가 발생하자 가장 먼저 불려 나온 단어는 ‘고령 운전’이었다. 인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 운전자가 사고를 냈으니, 나이 든 사람은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자는 논리였다. 아직 원인과 사정이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사고였지만 ‘고령’이라는 정보는 금세 이 참사의 원인을 대표했다. 사고의 원인이 음주도, 마약도 아니었다는 정보가 하나둘씩 뉴스로 나오면서는 더욱 ‘고령 운전 금지’ 논란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사고의 원인을 쉽게 ‘고령 운전’의 탓으로 돌려도 될까. 사고 이후 열흘여가 지난 지금, 이 사고는 이미 누군가의 눈으로 재구성되고, 그 누군가는 선택적으로 ‘공공의 기억’을 만들었다. 그 결과 모두가 기억하게 된 단어가 ‘고령 운전’이었다는 점은 한국사회의 어떤 면을 정확히 반영한다. 일찍이 젠더 연구자들은 기억의 뒤에 권력이 있다고 말하며, 기억이 쓰여지는 관점을 의심했다. 하물며 뉴스와 시민들이 남기는 여러 기록, 일상적인 대화로 재생산되는 ‘공공의 기억’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야기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관점에서 쓰여지며, 권력관계는 기억 뒤에서 무엇을 기억할지, 무엇을 망각할지를 촘촘하게 조각한다. 권력관계의 눈으로 이 ‘고령 운전’ 담론을 의심하는 까닭이다.

◇9일 오전 포털 사이트 ‘네이버’ 에서 ‘고령 운전’으로 검색한 결과 나온 화면.

◇9일 오전 포털 사이트 ‘네이버’ 에서 ‘고령 운전’으로 검색한 결과 나온 화면.

그렇다면 이 안에 담긴 권력관계는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죽는 것보다 치매가 더 무섭다’는 말이 상식으로 통한다.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돌봄을 통해야 생활할 수 있는 노인들은 쉽게 무시의 대상이 된다.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0.4%로 OECD 38개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¹. 노인 자살률 역시 압도적인 1위다². ‘혐오민국’의 부끄러운 성적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권력관계의 열위에 놓이고, 사회적 배제로 인해 생존의 위협에 내몰리는 집단은 조용히, 순응하며 살 것을 요청받는다. 그래서 혐오의 말은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의 집단, 혹은 사람을 배제하기 위한 권력을 상징한다. 이야기의 뒤편에서 그저 ‘피해의 원인’으로 지목될 뿐인 노인들의 이야기에 마이크를 준 적은 과연 있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권력이 명확한 상황에서 ‘노인’이 불려 나오는 상황은 그래서 혐오적이다.

자동차 핸들 속에서도 불평등은 교차한다

극심한 ‘노인 혐오’ 속 고령층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원인이 좀 더 명확해진다. ‘사고’를 빌미로 쉽게 비난의 대상에 올랐으나, 노인의 운전은 이동권 문제와 결부돼 있다. 대부분의 농어촌에는 시내까지 가는 버스가 턱없이 모자라고, 고령층 상당수는 병원 다니기조차 어렵다. 국토교통부의 ‘대중교통 현황조사’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국 버스 면허 대수는 5만 3,171대에 이르지만 군 단위 지역에 배치된 농어촌버스 수는 단 4.3%, 2,287대에 불과하다. 배차 시간에도 극명한 차이가 있다. 서울의 버스 평균 배차시간은 10.1분으로 전국에서 가장 짧지만, 경북 지역 주민들은 70.7분, 강원에서는 71.1분을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다². 서 있는 것만으로 허리와 다리가 아프고 눈앞이 핑핑 도는 어르신이라면, 한여름 해를 피할 공간조차 없는 길거리에서 71분을 기다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지역불평등과 연령차별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남해군의 ‘고현선’ 농어촌버스 노선도. 일부 지역은 한 나절 내내 버스 한 대를 잡기가 어렵다. 자료=남해군https://www.namhae.go.kr/depart/Index.do?c=DE0504030000

◇남해군의 ‘고현선’ 농어촌버스 노선도. 일부 지역은 한 나절 내내 버스 한 대를 잡기가 어렵다. 자료=남해군https://www.namhae.go.kr/depart/Index.do?c=DE0504030000

더욱 심각한 점은 농촌 주민들의 이동권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호남지방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걸어서 15분 이내에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는 전남지역 마을 수는 2010년 316곳에서 2020년 543곳까지 늘어났다. 10년 새 무려 1.7배 증가한 셈이다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운전을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까. 아직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적 문화가 뚜렷하게 살아있는 농어촌지역에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남성이다. 고령의 여성 주민들은 남성 운전자가 ‘키’를 쥐고 있는 이동 수단에 의존하거나, 그마저도 불가능하면 뙤약볕 아래 전봇대를 붙들고 서서 한나절에 한 번 오는 버스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