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덥고 습한 여름 어떻게들 보내고 계신가요? HSC는 장장 10개월 동안 거의 쉬지 않고 글을 써낸 시간을 축하하며 부산에서 워크샵을 진행했습니다. 그간 무려 39개의 글을 발행했고, 이 글은 40번째 글입니다. 쉽지 않은 공동의 글쓰기를 우리는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보았어요.

더불어 그동안 HSC와 함께해주신 독자와 동료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건강과 의료, 돌봄, 젠더, 노동, 그리고 지역에 대한 저희의 글들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도 궁금해지네요. 우리는 무얼 위해 쓰고 읽고 서로 응시하는지,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단순한 감상도 좋고, 제안이나 충고, 또는 좀 더 진지하고 엄한 글도 환영이예요. SNS의 메세지는 물론 팀 이메일도 열려있어요. 혹시라도 HSC와 함께 나누고픈 말이 있다면 주저말고, 운을 띄워 주세요 😃  어떤 말이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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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한국 번역본 표지. 1938년 말 모로코에서 집필 중인 오웰의 모습이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한국 번역본 표지. 1938년 말 모로코에서 집필 중인 오웰의 모습이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HSC의 10개월

Health Socialist Club 팀 블로그를 운영한 지 10개월이 되었다. 여섯 명의 글쓴이가 글을 2주에 한 번 쓸지 1주에 한 번 쓸지 치열하게 논의했지만 결국 1주에 한 번으로 결정을 내렸고, 거의 빠지지 않고 일주일에 한 개의 글을 올려 40개의 글을 함께 썼다. 매주 글을 발행하기 전에 구성원 전원이 검토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미리 정한 일정에 맞춰 초안을 업로드하고 맞춤법과 문장부터 글의 논리와 공적 함의까지 꾸준히 말과 글을 주고받았다. 각자의 관심사와 역량에 따라 서로 어떤 역할을 담당할지 대략의 합의가 만들어지고 6주마다 돌아오는 마감을 의식하며 글감을 기획하게 됐다.

나름의 열성을 담아 글을 쓰고 정리한다지만, 글이 읽히는 건 또 다른 일이다. 그 사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팔로우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글 자체의 조회수는 그때그때 다르다. 간혹 만나는 사람들이 블로그 글을 잘 읽고 있다며 내색을 하거나 서로 말을 걸어본 적은 없었던 온라인 친구가 글에 동의한다는 피드백을 남겨주는 등 글쓰기에 대한 반응도 만날 수 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자발적 글쓰기를 하는 노력을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마감을 지키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모였는지 신기해하는 지인도 있었다. 공동의 자발적이고 비영리적 활동이라는 게 워낙에 드문 일이 되어 버려서일까. 뭐랄까 “희한한 일을 벌이고 있네” 같은 반응을 마주하며 오히려 이쪽에서 재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구성원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글을 써서 의사소통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소위 공적 글쓰기가 처음인 건 아니다. 쉽고 빠른 반응을 얻을 수 있는 SNS도 있으니 좋아요👍와 리트윗🐣에서 발생하는 도파민도 솔직히 새롭진 않다. 하지만 공을 들여 내용과 논지를 정리한 글이 존중하는 이들에게 읽혀 소소하게 인용되거나 잘 읽었다는 피드백을 받으면 적잖게 기쁘다. 열의를 다해 글을 쓰고 알리는 건 어쨌든 글 읽고 쓰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특권을 허용한 사회에 대해 마땅한 책무를 지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 예산 지원을 받아 공식적으로 하는 연구의 경우에도 딱히 널리 읽히거나 인용되는 일은 흔치 않으니, 다른 방도를 모색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흔히 하는 말이 슬쩍 가려두었던 사실도 알게 됐다. 땅을 냅다 판다고 수맥을 짠 만나는 건 아니어서 물터가 마르지 않게 하려면 꾸준히 새 물을 떠서 나르는 수밖에 없다.

글 쓰기의 동기

80년 전 조지 오웰은 한 에세이에서 천성에 안 맞는 직업을 택해 불행을 겪은 후 권위에 대한 타고난 반감이 글 쓰는 자아를 이끌게 되었다면서 글 쓰기의 동기를 네 가지로 설명했다. 이는 첫째, 순전한 이기심이다.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마음, 언젠가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에게 앙갚음을하고 싶은 욕구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미학적 열정이다.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고 낱말과 낱말들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감탄하고 이를 공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동기 등이 있을 수 있다. 셋째, 역사적 충동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며 그것을 보존하려는 욕구다. 세상을 재현하는 글과 말에 대한 한참 더 복잡한 인식-존재론의 필터가 끼어들긴 하지만 대체로 생계와 연관되는 글쓰기란 대개 이와 관련이 깊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은 정치적 목적에 의한 글쓰기다. 조지 오웰은 이때의 정치란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정치를 지칭한다면서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글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에 비롯한 글쓰기다.

HSC를 시작하며 스스로 소개했던 글 등에서 누차 밝혔듯 이 블로그의 글들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특정한 관점에서 어떤 세상을 지향하며 입장을 밝히는 글쓰기를 하는 일은 뭐랄까, 조지 오웰이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사회와 정치를 말해야 했던 것처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공공의식의 발현이라기보단 좀 더 단정하고 양지바른 자리에 나의 사고와 활동을 놓아두려는 노력이다. 세상 살며 알게 된 이런저런 일들에 관한 짜증, 분노, 경악, 공포, 실망, 냉소 같은 것들을 트위터에 어울리는 짧은 감상으로 휘발시키는 대신, 조리 있는 글이 되도록 정리하고 연결하는 과정을 애써 거치는 연습이다. 솔직히 문란과 패륜을 넘나드는 발화가 주는 얕은 재미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런 말과 글들은, 좋게 보면 전복적이지만 대체로 야비하거나 무책임한 냉소에 그치기 쉽다. 좀 더 공적이고 사회화된 형태의 문장을 짓는 건 공론장의 시민으로서 나의 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는 일이다. 말과 글이 자아를 규정하고 구성한다는 면에서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익명성 뒤에 숨어 냉소와 혐오를 오가던 어떤 자아를 탈탈 털어 동료 시민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공적 자아로 씻어내는 작업은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자고로 생각은 깨끗하게 씻어서 내어놓아야…뭐야 내 생각 돌려줘요

자고로 생각은 깨끗하게 씻어서 내어놓아야…뭐야 내 생각 돌려줘요

글로 짓는 실뜨기

새삼스럽지만 10개월을 거치며 개인 아닌 조직이어서 가능하고 필요해지는 여러 가지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다. 전반적인 지향과 관점이 비슷해도 의견이 미묘하게 다를 때 발생하는 충돌이 더욱 열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조심하게 됐다. 도무지 글이 풀리지 않아 징징대며 대강의 문제의식과 단어들을 연결만 해 내면 동료들이 칙칙폭폭 글을 대신 완성해 주는 신묘한 경험도 했다. 공동의 지향 속에서 서로 달달 볶고 졸이고 나면 글이 어떻게 나아지는지 매번 확인한다. 물론 글을 같이 쓴다는 건 간혹 피곤하고 종종 부담스러운 일이다. 동시에 공동의 글쓰기는 함께 굴리는 자전거 같은 느낌이어서, 내가 발을 슬쩍 떼어도 팀의 누군가는 페달을 열심히 밟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나아가게 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연구를 업으로 삼는다고 적확하게 글쓰는 역량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두루 유능하단 평판이 있는 모 교수는 언젠가 같이 책을 쓰자는 동료 교수들에게 “솔직히 우리 글 못 쓰잖아, 유튜브면 모를까 책을 어떻게 써?”라고 말했다고 한다. 좋은 판단이다. 같은 교수는 또 언젠가, 교수들과 어울리려면 골프는 꼭 쳐야 한다는 조언도 했었다. 두 문장의 대구를 맞춰 보면, 글 아닌 방식으로 소통하려는 연구자가 가닿을 수 있는 범위와 관계는 골프 모임 정도의 규모와 형식일 거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펄펄 끓는 지구 때문인지 요즈음 자꾸만 우리는 파국을 상상하게 되곤 한다

*펄펄 끓는 지구 때문인지 요즈음 자꾸만 우리는 파국을 상상하게 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