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과학이 너무나도 빠르게 발전하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변화가 빠른 나머지 내가 세상에서 뒤쳐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더불어 과학을 앞세워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과학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런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과학을 수용하고 비판해야할까요? 더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과학 비평이 더 많이 생산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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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과학을 다루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문을 펴면 건강에 관련된 기사는 물론이고 인공지능을 다루는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서점을 가도 과학 코너에서 다양한 책을 볼 수 있다. 이런 글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현실 문제에 대해 쉬운 해결책을 제안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글이 소개하는 과학 이론에 맞춰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당뇨를 비롯한 대사질환과 이를 유발하는 비만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이 가운데 오젬픽이나 위고비 같은 GLP-1 유사체 비만 치료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약물의 등장으로 비만이 사라질 것이라는 낙관론에도 한 달에 수십만 원에 달하는 비싼 가격 때문에 얼마나 보급될지는 미지수다. 한 알에 수십 원에 불과한 기존의 당뇨약도 빈곤과 낮은 의료접근성 때문에 많은 노인이 제대로 복용하지 못한다. 따라서 약물이 개발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론은 경제적 격차가 해소된 유토피아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하물며 1990년대 초반 출판된 이기적 유전자를 필두로 인간 사회와 행동을 진화론에 근거해 이해할 수 있다는 책이 1년에도 몇 권씩 나오고 있다. 동물에서 확인된 이론을 인간에게까지 확장하는 대부분의 주장이 엄밀한 통계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통계학적 잣대를 통하지 않더라도 인종차별이나 성폭력 같은 현상을 동물의 본능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 연구자들이 오랜 기간 우익 정치 세력으로부터 금전적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학에 바탕을 둔 많은 글이 잘못된 사실이나 해석을 전달하는 경우가 이처럼 많음에도 이에 대한 비판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과학에 기반을 둔 주장이 대체로 사실일 거라는 인식뿐만 아니라 전문 지식이 과학 비평에 필수적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과학이 우리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과학적 주장의 사실 여부는 그다음의 문제다. 사실 여부만 중요하다면 과학자만 참여하는 학술지 속의 토론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과학자 사이의 합의만 중요했다면 과학 기사나 대중과학서 같이 일반 대중을 독자로 하는 글은 애초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전문 지식이 없더라도 과학적 주장에 이상함을 느낀다면 누구나 비평할 수 있고 과학적인 사실조차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지식의 여부나 자격을 따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

‘좋은’과학 비평이 가능하려면

다음은 포용적이고 좋은 과학 비평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이다.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과학 비평을 위해 생각해보자.

보건복지부 카드뉴스. (2020.11.02).

보건복지부 카드뉴스. (2020.11.02).

먼저, 잘못 알려진 학문적 위계에 기죽지 말자. 물리학은 생물학보다 정확하고, 생물학은 사회과학보다 정확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예를 들어, 단순화된 수리모형을 수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맹신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코로나 유행을 예측하려고 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코로나 예측 모델은 이상적인 상태의 기체를 다루는 수식을 기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실의 유행을 잘 예측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학적 모형의 정확성에 대한 사람들의 굳건한 믿음은 모형이 내어놓은 숫자에 기대어 유행에 대처하는 방식을 과학적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게다가 이들은 유행 억제에만 초점을 맞춰 실제 사람들의 삶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사회적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대책을 제안하기도 했으니, 예측이 맞았더라도 비판받을 만했다.

그는 왜 성추행의 원인을 과학에서 찾는가

그는 왜 성추행의 원인을 과학에서 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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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전문가가 아니어도 과학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자. 많은 이들이 과학에 근거한 주장을 마주했을 때 바람직하다 혹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규범에 근거한 비판을 피하고, ‘과학적’으로 옳거나 틀리다는 방식으로 싸우려고 한다. 예를 들어, 산모의 출산연령이 오르면서 선천성 질환을 가진 신생아가 많이 태어난다는 주장에 어머니의 연령은 문제가 아니라거나 사실은 아버지의 연령이 더 문제라는 식으로 반박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과학적 진실이 우리에게 중요할까?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 문제는 여성의 재생산권이나 장애인의 인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일이지, 생물학적 원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거기에 사회가 맞춰야 하는 성격의 일은 아니다. 과학적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잘해야 개인의 호기심 충족에서 그치는 데 비해, 사회적 약자도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원리는 각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에 당위적 주장,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질병을 피하는 일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반론으로 맞서는 것이 오히려 과학 비평의 취지에 더 부합한다. 이런 식의 평가는 과학적 전문 지식을 갖추지 않아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끌어낼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 대한 일이라면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도 더 부합한다.

과학에 주눅들지 말자. 어려워 보이는 과학을 비평하는 이유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을 바꿔 놓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과학 성적이 좋지 않아도, 박사님이 아니어도 괜찮다. 과학을 말하는 이유가 우리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