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없는 한국의료 6개월, 남겨진 질문들] 네 번째 이야기 : 의사 없는 병원은 어떻게 돌아갔을까

2월 19일, 전국에서 전공의들이 진료 현장을 이탈한 이후 병원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갔을까? 흔히 언론에는 ‘과로하는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하지만 실상은 이보다 복잡하다. 의사면허는 사람을 살리고 돕기 위해 주어진 권한이지만, 위계로 점철된 병원에서 다른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쥐고 흔드는 열쇠이기도 하다. ‘의료 대란’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지금, 환자의 삶뿐 아니라 병원노동자의 노동환경도 커다란 위기에 놓였다. 이 위기는 면허가 만드는 위계를 따라 아래로 흐르며 노동자의 삶을 잠식하고 있다.

수술실 자동문이 열리면 간호사가 입혀 주는 가운을 입고 깨끗하게 정리된 무균구역으로 걸어들어온다. 이미 잠든 환자 앞에 서서 주인공은 말한다. “오늘도 소중한 생명, 꼭 살립시다.” 그리고는 수술도구를 건네받는다. 음악이 깔리며 카메라는 밑에서부터 주인공의 얼굴을 천천히 비춘다. 환한 무영등이 더욱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장면이 넘어간다. ‘의사’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드리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장면이다.

수술실을 비추는 이 짧은 장면은 병원에서 의사가 가지는 권위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환자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를 제외하고도 아주 많은 노동자가 노력하지만, 수술실 한가운데서 다른 노동자를 둘러보며 “꼭 살립시다” 말할 수 있는 권한은 의사에게만 있다. 치료를 주도하고, 병원노동에 관여하는 직군을 휘두르는 힘, 의사의 권력은 병원노동의 중심이다.

의사가 가지는 권력은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의료 대란’의 핵심이기도 하다. 2월 19일 의대 정원 증원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이 하나둘 병원을 ‘개별적으로’ 빠져나갔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파업, 혹은 사직을 할 수 있는 권한은 모든 노동자가 갖는 권리다. 그러나, 파업을 선언하고 시위와 집회를 할지언정 그날 사직서를 내고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는 매우 드물다. 하물며 고용주도 아닌, 정부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직서를 내고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는 상상조차 어렵다. 사직서를 던지듯 내 버리고 하루아침에 나간 노동자에게 사직 효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끊임없는 유예 기간을 주고, 대화를 하자며 국가와 사회가 구걸하듯 나오는 장면은 이 ‘의사 권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2020년부터 시즌제로 방영되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사진=TVN https://tvn.cjenm.com/ko/doctorlife/

◇2020년부터 시즌제로 방영되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사진=TVN https://tvn.cjenm.com/ko/doctorlife/

병원에는 위계가 있다

근로기준법은 따로 ‘사직’을 규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일반 노동자는 사직 시 회사의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 등을 토대로 시점을 상의한다. 퇴사하는 노동자 입장에서야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악쓰고 싶은 사업장이라도, 일반적으로는 차후의 평판, 혹은 남을 동료를 위해 대체 인력을 구할 시간을 주고 남은 사람들에게 업무를 인계한다. 하지만 사직서를 내던진 전공의들은 병원이 대체 인력을 구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병원을 이탈했다. 우왕좌왕하던 병원이 사직서를 수리한 시점은 6월이니, 4개월은 근무 현장을 ‘무단이탈’한 셈이다.

이 안하무인격인 현장 이탈은 그 자체로 병원과 고용시장에서 이들에게 허락된 어떤 자유를 보여준다. 경영의 논리 안에서 엄격하게 통제되는 다른 병원노동자와 달리, 의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처방의 권한을 토대로 다른 병원노동자에게 ‘오더,’ 즉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은 의사직군만이 가지고 있다. 진료의 대부분 과정은 의사의 ‘오더’가 없으면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다른 병원노동자의 움직임은 여기에 따라 통제된다. 물론 이는 의사가 사람들을 위해 올바르게 전문성을 발휘한다는 전제 아래 사회가 부여한 것이다.

문제는 이 권력이 진료 현장을 넘어 병원노동, 그리고 의사가 존재하는 여러 일터의 일상에까지 흘러내린다는 데 있다. 뉴스에도 자주 보도되듯, 의사의 권력을 이용해 동료 노동자들에게 폭언을 휘두르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관련기사: "야! XX 같은 것" 의사 폭언…간호사에겐 일상이었다, “폭언에 고성”…대학병원 의사 ‘갑질’ 논란 파장). 이보다는 노골적이지 않지만, 외부 회의를 목적으로 진료 일정을 조정하거나, 팀 회의 일정과 일 추진 상황을 자신의 일정에 맞추는 행위도 ‘의사’가 아니라면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다. 진료 현장을 팽개치고 나간 의사 집단의 행위는 이 권력을 ‘사람들을 위해’ 쓰는 대신, 의료기관을 마비시키는 데 썼다는 점에서 사회적 믿음을 배반했다. 의사가 나간 뒤 병원이 휘청이는 까닭은, 그만큼 병원이 의사 권력 아래서만 움직이도록 짜여졌기 때문이다.

‘아수라장’ 속 숨겨진 말들

그만큼 ‘의사면허’가 만드는 공고한 권력은 의사를 정점으로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결정한다. 그리고 위계에 따른 불평등을 승인한다. 받는 돈에도 차이가 나지만, 이 위계를 단지 월급 차이로 축소하기에, 이 불평등은 더 너른 영역에 걸쳐져 있다.

병원의 업무와 운영을 결정하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우선 지방의료원 등 일부 기관을 제외하면 의료기관의 장은 의료법상 의사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뿐이 아니다. 병원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한 역시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병원의 주요 보직에는 대부분 의사가 있다. 때로 소수의 간호사가 임명되지만, 실제 발언권은 크지 않다.

작은 지역사회라면 병원에서의 위계관계가 지역 주민의 일상마저 흔든다. 면허, 혹은 자격을 가진 노동자가 근무하는 일터는 상당한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는, 지역에 드문 ‘좋은’ 일자리다. 지역에서 의사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도권 대형병원 은퇴 의사를 포함,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 하는 한국 상황에서 병원이 의사 중심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더욱 심각한 사실을 내포한다. 주로 수도권 출신이거나 근무 조건이 조금만 나빠져도 수도권으로 돌아갈 의사들이, 지역에 사는 노동자의 삶을 제약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