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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면 지금의 '돌봄'논의는 어디를 향해서 구성돼 있나요. 모두의 삶에서 존재할 돌봄, 그 고통이 여러 갈래 겹치는 자리에서 돌봄을 다시 말해 봅니다. 취약성의 자리에 서서, 말해지지 않은 필요와 조직되지 않은 사회적 자원을 다시 엮어 봅니다. Health Socialist Club은 1년 전 문을 열며, '돌봄과 의료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다' 라는 제목으로 돌봄과 분리돼 버리는 의료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돌보는 사람이 겪는 고통과 사회적 권력의 문제, 그리고 무엇이 이를 지속시키는가를 짚어봅니다. 보이지 않도록 짜여진 노동과 전문화의 함정, 그리고 이들을 성공적으로 분리해내는 사회적 권력을 문제삼기, 언어와 연대의 힘으로 변화 실천하기. Health Socialist Club이 변치 않고 목표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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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말했다. "너 자꾸 이러면, 사람들 사는 세상에서 못 살아. 엄마랑 아빠랑 누나랑 사람들이랑 같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했어?" 그의 ‘아이’는 답했다. "달리는 버스 바퀴 만지지 않기." 엄마는 다시 말한다. "그리고 또." 다시, ‘아이’가 답한다. "도로에 눕지 않기. 소리지르지 않기. 안 할게요. 약속" 엄마는 돌아서며 말한다. "너, 엄마가 죽고 나면 어떻게 할래? 엄마는 네 옆에 영원히 있을 수 없어."
인지적인 문제를 겪는 장애인, 그리고 보호자와 가족들 사이 반복되는 ‘전쟁’의 한 장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는, 장애인을 돌보는 보호자의 호소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지 어느덧 19년째인 2024년 한국에서도,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가 모르는 어느 집집마다 이런 ‘생사가 오가는’ 전쟁이 벌어진다. 돌봄이 바야흐로 ‘시대정신’이자 누구나 한 번쯤은 언급하고 넘어가는 문제가 됐다는 이 시점에서도 돌봄하는 이들이 끌어안은 고통과 소외의 문제는 여전하다.
◇영화 ‘말아톤’ 스틸컷. 출처=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태어나게 하고, 기르고, 먹인다. 인간이 사회 공동체 안에서 ‘인간’으로 자리할 수 있게 보살핀다. 오랫동안 ‘여성’ 의 일로 여겨져 왔던 이 ‘돌봄’은, 사람을 사람이게 만드는, 인간 공동체의 유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무엇이지만 오랜 기간 저평가와 무시 안에 놓여 왔다. 비단 아이를 기르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돌봄 안에는 정상성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근대국가, 효율성을 기준으로 집행되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이 규범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회 안으로 포함시키는 일도 포함된다.
그렇기에 트론토(Joan C. Tronto)를 비롯한 많은 이론가들이 말한 바를 굳이 되새기지 않아도, 돌봄은 공적 업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를 이어나갈 인구가 필요하다. 태어난 사람은 또다시 사람의 손길을 거쳐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걷고, 말하고, 사회적 규율을 깨우치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에서는, 낭만화되는 ‘돌봄’논의의 밖에서, 정작 이 가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투명인간으로 방치돼 있다.
‘투명인간’ 되기
중증장애 자녀를 두고 돌봄의 과정을 지난하게 거쳐 온, 일본의 사진가 야마모토 미사토는 ‘돌봄노동’의 무한 대기 속에 놓인 자신을 투명인간이라고 불렀다. 장애아동의 보호자란,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 뒤에서 ‘투명’하게 존재해야 하는 투명인간이라는 뜻이다.
부르면 달려와야 하지만,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어디에나 있어야 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의 자리는 없다. 기다리고, 부탁하고, 사과한다. 이것이 대체로 여성인, ‘투명인간’들에게 부과된 이중적인 과제다. 대개 돌봄이라는 노동은 그렇다. 언제 변할 지 모르는 당사자에게 눈과 귀를 집중하고, 마음은 24시간 ‘비상 대기’다. 돌봐야 할 사람이 사회적인 규율을 익힐 수 없거나, 의사소통을 할 수 없거나, 더 많은 사회적인 관용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어떨까. ‘투명인간’들이 해야 할 ‘이중적인 연극’은 끝이 없고, 깊게, 오래 지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체로 ‘죄인’이거나, ‘게으른 사람’이거나, 질병 혹은 장애의 원인으로 의심받는다.
◇일본의 사진가 야마모토 미사토가 장애 자녀를 돌보며 느낀 현실을 엮은 책 ‘투명인간.’ 표지에는 “’보이지 않아야’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모든 어머니들께”라고 써 있다.
의료와 교육, ‘돌봄’은 어디까지 분리돼야 하나
의료, 그리고 교육에는 공통점이 있다. 공동체 유지에 필수적이며, 가장 직접적으로 ‘인구’의 생산성을 관리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근대 이후 의료와 교육을 국가가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로 취급하고, 공공의 세금과 통제 아래 관리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투명인간들이 난관에 부딪히는 가장 결정적인 지점도 여기에 있다. 도움을 구하러 간 의료 현장에서조차 이 ‘투명인간’들의 난관은 깊어진다. 장애는 질병이 아니지만, 많은 경우 의료와 밀접하게 붙여 있는 탓이다. 사회적으로 기대할 만한 돌봄 자원이 거의 없는 한국이라면 더욱 그렇다. 발달장애를 겪으며 곳곳에서 부적응을 일으키는 장애인과 보호자에게 정신과 의사는 말한다. “약 먹고, 4주 뒤에 봅시다.”그러나 그 4주간 보호자가 겪어야 하는 고충은 진료실 밖에 깔끔하게 분리돼 있다.
자해를 하고, 두드러기까지 난 피부를 긁어서 곳곳에는 피딱지가 지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어 수시로 토사곽란을 하고,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에 온통 정신이 빼앗긴 채 따라가다가 교통사고까지 당하곤 하는 발달장애인, 좁은 전문분야별로, 의료의 난이도별로 촘촘하게 나눠져 있는 한국의 의료가 보살피지 않는 4주 동안 보호자가 겪어야 하는 일은 어느 정도일까. 좁은 전문분야별로, 의료의 난이도별로 촘촘하게 나눠져 있는 한국의 의료는 상황상황마다 감히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를 많이도 파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