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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치른 여러분, 입시를 치르지 않기로 결심한 여러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미래를 응원하며, HSC가 연대의, 연대를 요청하는 마음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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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치른 여러분께,
제가 대입을 치르던 2010년께는 인스타그램은 물론 라이브 인터넷방송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수능철이 다가오면 기사마다 도시락 싸는 법부터 준비물과 금지품목을 알려주는 정보로 가득했고, 심지어 수능을 치르지 않는 친구들도 무언가 응원받는 느낌 반, 내몰리는 느낌 반 정도를 품고 어른의 길목 위 한 시기를 함께 배웅했어요.
다이내믹 코리아의 풍경은 참 빠르기도 합니다. 동네 가게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수험생할인'은 대기업과 쇼핑플랫폼의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했고, 이 손상되는 지구 아래 '수능 한파'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지요. 수능을 코앞에 둔 11월의 어느 날, 도로변에서 활짝 꽃핀 장미를 보았어요. 8월에나 피어야 할 장미가 어느새 11월에 피어 있을까. 한파를 대신해 등골이 서늘해지는 풍경이었습니다.
사진출처 @**Muziktiger**
2024년 한 해, 수능을 치른지도 오래 됐건만, 이 ‘거룩한 의식’을 보는 마음은 수험생이었을 시절 이상으로 편치 않았어요. 정부는 2월 의대 정원 증원을 발표했고, 마치 한국인에게 이 수능은 의사라는 신분에 입성하기 위한 하나의 관문인 것처럼 느껴지는 나날이 이어졌지요.
'개돼지', '국평오(국민 평균 5등급)’ (☞관련기사 : 삐뚤어진 엘리트주의... 1 대 1 의·정 협의체는 안된다),라는 폭력적인 말,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과 내몰리는 다수 사이, 수능등급은 명실상부한 조롱의 수단으로 등장했습니다. 사교육 시장에서 교육서비스를 판매하던 사람들은 어땠나요. 예능에 나와 '그렇게 공부하면 의대에 못간다'며 호통을 쳤지요. 교육부의 의대정원 증가 발표 이후 1년 내내 바쁘게 글을 쓴 기자들은요? 본인이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의 논리조차 맞추지 못한 채 권력에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습니다. 의정갈등이 정체되는 국면마다 '의대 증원으로 늘어난 N수생'의 규모를 추측하고, '의대 입시를 위해 반드시 맞춰야 할 킬러문항' 공략법을 제시하고, 수시와 정시 중 어느 쪽이 유리할 지 분석하느라 숨돌리실 틈은 있었을까 싶네요. 물론 사교육시장에서 흘려준 최저등급과 합격선을 내세워 의대와 한의대, 치대, 약대를 비교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겠지만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것은 한국인의 사회적 의례를 그저 ‘의사면허를 얻기 위한 전용포탈’ 취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고 어른이 되기 위한 최종관문을 앞둔 청소년의 미래를 유린하는 일이었고, 사회에 대한 신뢰와 기성세대에 대한 믿음을 내팽겨치는 과정이었습니다. 다 큰 어른이라면 마땅히 창피함을 알아야 했고, 우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병원은 마치 모노폴리 게임의 증강현실판처럼 나날이 거대해져 왔습니다. 이 게임의 규칙은 자산증식을 통한 승자독식. 의료행위에 대한 권한도, 개원이나 보상의 주체도 모두모두 독식하고야 말겠다는, 한 집단의 일념이 결국 다른 참가자들을 파산으로 내몰고 있는 것 아닌지요. 소수에 의한 독식은 병원노동자만이 아니라, 동료 의사들도 위협하고 있습니다. 환자유치나 비급여의료에 소극적인 의사라면 폐업을 고민하거나 월급을 받는 봉직의 취업을 노린다는 기사를 이미 여러 번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2024년 정부의 의대증원은 게임의 참여자를 늘리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게임에 참여한 사람도,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출발선에 매달리는 사람도, 이미 승자독식이라는 규칙이 유지되기를 원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과연 소수가 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독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은, 고이고 고인 게임판에서 정말 소수가 모든 자원과 부를 독점하는 날이 오면 게임은 끝이라는 점입니다. 게임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참가자들 간 소통과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이지만,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사람도, 서비스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여력도 없는 판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치열하고 경쟁적인 한국사회에는 오늘도 “수능을 못 치르면 인생이 망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수능’은 성인식을 넘어 한 사람의 멸망을 막기 위한 치열한 생존게임이 되어버렸을까요. 동네 크고 작은 가게마다 '수험생할인'을 써 붙여 놓은 광고지들, 수능이 끝나면 한동안 교실에 은근히 퍼지던 파마약, 염색약 냄새. 이 위로가 체제 순응적이란 걸 알만큼 나이를 먹고나니, ‘근면성실’하게 계급을 재생산하려는 한국인들의 의지가 몹시 섬뜩하네요.
여러분이 의대 입시를 희망했던 수험생이라면, 그 희망이 이뤄지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제안합니다. 이제, 모두가 ‘의사’라는, 안정적이고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는 대신 이 게임판의 규칙을 바꿔 나가면 어떨까요. 의사가 아니어도 모두 사람들의 건강을 향해 고민하고 협력하고, 같이 형평한 미래를 모색하는 사회로 가기 위한 첫 발을 내딛어 보면 어떨까요(☞관련자료 : [고래가 그랬어: 건강한 건강수다] 모두 건강을 돌보는 사람들). 독점 대신 협력, 권력 대신 연대로, 사람들의 건강을 향한 만만찮은 여정을 함께 해 나가자는 제안입니다. 여러분, 동료가 되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