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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고통스럽고 어려우리라 예상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비극 속에서도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서 지며 돌파할 때 모종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고, 때로는 기쁘고 즐거울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가 더 용감하고 성실하게, 말을 건네고 함께 논의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2024년의 시민들이 이토록 고생스럽게 지켜낸 민주주의가 더 넓고 촘촘하게 모두의 삶을 지켜낼 수 있기를. 모두의 수고에 경의를 보내며, 2024년의 마지막 날이, 그리고 이어질 2025년의 날들이 안전하고 평온하며 정의롭기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분들께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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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한 해는 한국시민들에게 가혹하고 힘든 나날로 시작했고, 끝났다. 병원 현장을 떠난 의사들과 이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며 무력했던 봄, ‘오물 풍선’과 위협받는 평화에 공포스러웠던 여름,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와 경악할 수준의 디지털 성범죄 시장을 보며 분노했던 가을, 시민에게 총을 겨누는 정치권력의 모습을 보며 거리로 뛰쳐나갔던 겨울을 보냈다.

이 글의 발행을 앞두고 있던 12월 29일, 지역공항으로 가던 비행기에 사고가 발생해 시민 179명이 목숨을 잃었다. 안타깝게도 이 사고에서 우리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에서 시민들을 분노케 한 정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국가권력이 애도를 독점할 수 있다는 착각, 시민들의 애도와 연대, 조직된 힘을 막을 수 있다는 오만, 그리고 책임져야 할 일을 회피하는 무책임이다.

HSC는 당초 2024년을 마무리하며 쓰는 글을 통해 의료대란의 향방을 다룰 계획이었다. 그러나 12월 3일 밤 10시30분, “비상 계엄을 선포한다”는 말과 함께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벌어졌고, 그로부터 한 달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바라보며 ‘의료대란’ 그 자체 대신, 정치권력과 시민사회, 의사들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12월 12일자 지역별 윤석열 탄핵 긴급행동 안내를 위한 유인물. 12월 11일 윤석열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사회대개혁을 촉구하는 여러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을 구성・발족했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12월 12일자 지역별 윤석열 탄핵 긴급행동 안내를 위한 유인물. 12월 11일 윤석열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사회대개혁을 촉구하는 여러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을 구성・발족했다.

12월 21일자 민주노총 결의대회 유인물. 민주노총은 12월 21일 전국 16개 지역에서 시민사회와 함께 대회를 개최했다. 서울 결의대회를 마친 노동자와 시민들은 곧바로 남태령 전투에 참여해 농민과 연대했다.

12월 21일자 민주노총 결의대회 유인물. 민주노총은 12월 21일 전국 16개 지역에서 시민사회와 함께 대회를 개최했다. 서울 결의대회를 마친 노동자와 시민들은 곧바로 남태령 전투에 참여해 농민과 연대했다.

포고령, 그리고 의사들

모두가 목격한 놀라운, 자랑스러운 광경처럼, 공화국의 안녕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은 직접 광장으로 나섰다. 부산 서면과 대구 동성로에서, 대전 둔산동과 창원 용호동, 제주 이도2동, 서울 여의도와 광화문, 그리고 다시 남태령에서. 시민들은 각자 가진 불빛을 들고 거리로 나서 민주주의와 법치를 외쳤고, 12월 14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12월 14일 집회에는 의외의 인물들도 참여했다. 2024년, ‘그 일’ 이전에는 가장 뜨거운 ‘한 해의 핫이슈’를 만들어내던 집단, 의사들이다.

한국의 의사 집단은 대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자신들의 집단행동을 노동쟁의로 규정하지 못할 정도로 노동 혐오 역시 심하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시민과 노동자의 직접 행동에 연대해 온 이들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처럼 의사 사회 내에서 배척당하는 소수 의사들 뿐이었다. 하지만 12월 14일, 2024년 내내 윤석열 정부의 의사증원 정책에 반대해 왔던 의사들이 거리로 나섰다. 서울시의사회와 대한전공의협의회가 각각 부스를 차리고 민주노총과 시민사회 등 사회세력이 집결한 여의도에 출동, 직접행동에 나선 시민들을 지원했다.

계엄령의 다섯 번째 조항(아래 박스 참고)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계엄법에 의한 “처단” 대상으로 지목된 전공의는 모두 사직을 한 상태였다는 점이 상황을 우습게 만들기는 하지만, 계엄 포고령에 의료인 처단을 포함하는 일은 매우 뜬금없다. 지금까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모든 정책 중 지지율에 도움이 되었던 유일한 정책이 의대 증원이었기 때문에 포함이 된 것인지, 아니면 북한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소름 끼치는 포석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전 세계 독재자들의 포고령을 모아 놓고 분석해도 이런 조항이 포함되는 건 아주 이례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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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 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2024.12.03. 계엄사령부 포고령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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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나선 의사들은 외상 등 응급 처치가 필요한 시민들을 위한 진료를 준비했고, 시민들의 감사와 응원을 받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내란을 도모한 공화정의 적에게 대항하는 광장에서 연대의 폭이 어떻게 넓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인 셈이다.

그들만의 세계관은 계속된다

하지만 계엄 이후 쏟아져 나온 의사들의 말과 글들은 어땠을까. 오로지 의사와 정부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편협한 그들만의 세계관을 보여줬다. 권력의 비민주적 행사와 그로 인한 시민들의 공포와 고통은 안중에 없다는 듯, “감히 국가가 의사에게”로 읽힐 법한 분노의 말들이 쏟아졌다[1][2]. 지금까지의 의-정 갈등을 국가폭력으로 규정하며 의사들이 지난 2월부터 “계엄”의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도 등장했지만 사회적 맥락을 읽지 못하며 스스로를 피해자화하는 말들은[3] 이번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최근 의사들의 여론을 주도하는 모 커뮤니티에선 “계엄령에서 전공의를 명시한 건 그만큼 의사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라며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된 자신들의 권력을 뽐내는 글들이 한동안 올라왔다[4]. 지금이라도 그 권력을 활용해 2025년 의대 모집 정지를 독촉하자는 주장 역시, 진심으로 받아들여졌고 실제 의대생들은 각 대학 총장실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