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중순, 곧 음력으로도 새해다. 내란이 발생한 지 한 달, 지금도 상황은 크게 나아진 게 없다. 사람들은 아직도 내란 수괴의 체포를 촉구하며 길바닥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내란을 옹호하는 정당의 지지율도 주춤하는 듯하더니 기어이 내란 이전으로 회복하는 모양새다. 지지부진한 상황에 정치인과 지지자들 모두 자신감을 얻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숫자는 말한다. 내란 수괴에 대한 탄핵도, 내란에 대한 처벌도, 양당 사이의 정권교체조차도 그리 녹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국의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현실의 부당함을 말한다. 하지만, 집회가 커지고 현실의 부당함에 대한 공감대가 커질수록 어떤 ‘의제’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좁아지는 것 같다.

한국갤럽에서 2025년 1월 10일 발표한 정당지지도 조사결과(2025년 1월 7-9일 조사).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535

한국갤럽에서 2025년 1월 10일 발표한 정당지지도 조사결과(2025년 1월 7-9일 조사).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535

“평화적 계엄”이니, 피해가 없다느니 하는 궤변이 버젓이 공론장을 채우는 시대다. 다른 얘기를 할 여유가 어디 있냐고 말하는 입장도 이해한다. 큰 정치적 흐름에 자신의 이권이 담긴 의제를 슬그머니 ‘끼워 파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니, ‘전선을 흐리지 말라’며 화내는 사람들에게도 온당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준비는 필요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초인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일거에 해소해 주기를 기대한 결과 중 가장 극단적이고, 파국적인 것이 내란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단지, 그 초인이 생각하는 문제가 우리와 달랐던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말이다. ‘우리 안의 일베,’ 혹은 ‘우리 안의 이명박’을 생각해 보자는 오래된 말처럼, 작금의 한국 역시 누군가가 이쪽이고 저쪽이고 ‘우리 편 박정희’를 찾아대는 것 아닌지, 냉소하던 기억도 있다.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만들어 줄 독재자에 대한 소망이, 어쩌면 시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2016-2017년 당시,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힘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촛불혁명’이라며 찬사를 보냈었다. 코로나19 범유행이 시작된 이후에는 모두가 입을 모아 ‘포스트코로나’는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B.C.와 A.C.는 Before Corona와 After Corona가 될 것이라는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있었다. 두 사건 모두 역사의 허리를 끊어내는 대단한 단절인 것 같았지만 사실 달라진 결과는 매우 적었다. 세상이 크게 바뀔 것이라던 호들갑은 이제 흔적도 잘 보이지 않는다.

HSC라는 이름에 맞게 어느 사회주의자의 이야기를 빌려보자(☞Antonio Gramsci, “I Hate New Year’s Day,” 중에서. Viewpoint Magazine. https://viewpointmag.com/2015/01/01/i-hate-new-years-day).

그래서 나는 … 새해를 싫어한다. … 새해는 우리에게 삶과 정신의 연속성을 잃게 한다. 결국 사람들은 올해와 다음 해 사이에 단절이 있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진지하게 생각된다.

단절을 기대하는 마음과는 달리 삶도 정치에도 개벽은 오지 않는다. 우리가 착각한 것 일수도,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희망을 비춘 것 일수도, 단절일 수도 있었던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에 마주하게 된 파국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의도 정치라고 부르는 가장 좁은 형태의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너른 정치가 펼쳐지는 정책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보건의료도 마찬가지다. 무도한 대통령, 무도한 정권의 탓이야 있겠지만 지금 ‘의료개혁’이라 불리는 것 역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관료들은 의사들의 반대를 뚫고 숙원사업을 추진하려 불도저처럼 나섰다. 연구자들은 시민의 이익과는 관계없이 각자의 신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를 뒷받침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에 반대할 시민의 목소리가 끝내 발화의 창구를 찾지 못했다. 이 결과가 우리가 보았던 의료개혁이다.

이 혼란이 정리된다고 ‘의료개혁’을 밀고 가는 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위직 일부가 교체되겠지만 실무를 보는 공무원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정부위원회에 나가는 연구자들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전문가주의적 구조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 와중에도 보건복지부가 의료개혁 ‘방안’을 용감하게 내어놓을 수 있는 뒷배가 있다면 바로 저 구조다.

그러니 광장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시민들은 또다시 배신당할 것이다. 하지만, 여의도 정치인들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이렇게나 뒤집어져도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세상은 갑자기 달라질 것이라 굳게 믿는 우리의 기대에 배신당하는 것이다.

광장에서의 뜨거운 연대, 만남, 희망이 마음을 가득 채우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다시 만난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은 ‘뒤집어진 세상’에서 스스로, 또 함께 일상을 바꿔나갈 각오가 있는 사람들의 삶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바꿀 각오가 돼 있을까? 2016년의 ‘촛불혁명’이, 그리고 2020년 세계를 뒤집어 놓았던 ‘코로나 범유행’이, 2025년의 한국에 묻는다.

 “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expect to find roses growing on a garbage heap than a healthy democracy rising out of the ruins of Korea. 한국이 폐허에서 건강한 민주주의를 일으키는 것보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자라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폐허 속의 한국을 두고, 한 영국 신문은 이처럼 평했다고 한다. 하지만 쓰레기통에서도 장미는 핀다. 저절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 무엇보다 시민들의 조직된 연대로 핀다.
아산연구원(2023)에서 2차 인용. http://en.asaninst.org/contents/asan-plenum-2023-welcoming-remarks ⓒFreepik

“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expect to find roses growing on a garbage heap than a healthy democracy rising out of the ruins of Korea. 한국이 폐허에서 건강한 민주주의를 일으키는 것보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자라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폐허 속의 한국을 두고, 한 영국 신문은 이처럼 평했다고 한다. 하지만 쓰레기통에서도 장미는 핀다. 저절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 무엇보다 시민들의 조직된 연대로 핀다. 아산연구원(2023)에서 2차 인용. http://en.asaninst.org/contents/asan-plenum-2023-welcoming-remarks ⓒFreep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