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img src="/icons/thought-dialogue_blue.svg" alt="/icons/thought-dialogue_blue.svg" width="40px" />

[시리즈 소개]

"의료는 생명을 구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실 절반만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의료는 실제로 우리의 생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까요?

이 시리즈는 사람들의 건강과 의료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의사 파업 시 감소하는 사망률, 고비용 저효율의 미국 의료, 정체된 영국 NHS의 성과, 급격히 향상된 한국의 기대수명을 사례로 건강과 의료가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를 살펴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기술로 의료를 새롭게 이해해보자고 제안해보려 합니다.

</aside>

10여년 전, 세부 전공이 같은 한 동료와 했던 논쟁을 기억한다. 그는 한국에서 의료에 대한 국가 개입이 대단히 부당하며, 사회주의적 제도가 한국 의료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 고급의 의료를 위해서는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고, 이제 한국에는 이런 의료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충분히 있는데도 국가가 이를 막는 후진국형 의료 제도가 운용되고 있단 주장이었다.

동의할 수 없었던 나는 반론했다. 방금 말한 고급 의료의 나라, 미국을 보라고 말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은 국가가 의료에 대해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민간의료보험은 매우 복잡해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은 불가능하고 보험료는 아주 비싸다. 건강보험 없는 사람이 여전히 많고, 보험이 있어도 어디까지 적용되는 지 환자가 미리 예상하기 어려워 병원에 선뜻 가기도 어렵다. 그런 미국에서는 한국에 비해 의료비를 훨씬 더 많이 쓰지만 사람들의 평균 기대여명은 우리보다 한참 짧다.

그는 다시 주장했다. 미국의 의료는 매우 우수한데, 비용 문제로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어서 평균적으로 건강 결과가 나쁠 수 있지만 그건 의료랑은 다른 문제로 보아야 한단 거다. 그러면서 그는 전체 인구집단이 아니라, 미국의 소득 상위 10%와 한국의 소득 상위 10% 집단을 선별해서 이들의 기대여명을 비교하면 미국이 더 높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이테크 기술을 활용해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의료” 그 자체는 우수하다는 굳은 믿음이 담긴 얘기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료 기술이 우수하다는데 왜 미국 사람들은 일찍 죽을까?

2021년 출판된 한 연구는 이런 궁금증을 풀어준다. 이 연구에서는 소득 상위 1%와 5% 지역(county)에 거주하는 부유한 백인 시민과 다른 고소득 국가의 평균적인 시민들의 건강 결과를 비교했다. 영아사망과 모성사망, 유방암과 대장암 5년 생존율, 급성심근경색의 30일 치명률처럼 비교적 의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결과 변수를 활용해 12개 고소득국가(호주, 캐나다, 핀란드, 스웨덴, 프랑스, 독일, 일본 등으로, 아쉽게도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와 미국의 부유한 백인 시민의 상황을 비교했다.

놀랍게도 부유한 미국의 백인 시민들은 다른 나라의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많이 죽고 있었다. 상위 1%와 5% 지역에 거주하는 미국 시민에서 영아사망과 모성사망은 여타 국가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발생했다. 급성심근경색을 앓고 30일 내에 사망하는 사람도 비교 대상 국가들 중 제일 많았다. 대장암 생존율은 비교 대상 국가 중 중간 정도 수준이었고, 유일하게 가장 우수한 성적을 보였던 것은 유방암 생존율 뿐이었다(☞바로가기: 선진국 평균 시민과 미국 특권층 시민의 건강 결과 비교).

출처: https://ourworldindata.org/grapher/life-expectancy-vs-health-expenditure

출처: https://ourworldindata.org/grapher/life-expectancy-vs-health-expenditure

미국의 건강 수준이 처음부터 나빴던 건 아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대여명이 꾸준히 증가하던 1950~60년대 미국 남성들은 평균 정도, 여성들은 다른 나라보다 기대여명이 더 긴 편이었다. 본격적으로 뒤처지기 시작했던 건 1970년대 후반 정도부터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 복지와 공공지출을 줄이고 국가가 운영하는 건강보험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무산하며 의료의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승인, 강화하던 시기의 정체를 그저 우연으로 보긴 어렵다. 이후 미국과 다른 국가 사이의 건강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졌고 지금도 여전하다.

워낙 건강 결과가 나쁜 것으로 유명하다 보니, 다른 고소득국가와 비교해 미국에서 사람이 얼마나 더 죽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도 있다. 예컨대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미국의 사망률이 다른 잘 사는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몇 명이 더 살 수 있었을까, 즉 초과사망을 계산하는 거다. 가장 건강결과가 좋은 일본과 비교했을 때 2016년 미국에서는 88만 5천여 명(여성 52.9만 명, 남성 35.6만 명)이 더 죽었다(☞바로가기: 다른 18개 고소득 국가와 비교한 미국의 초과사망).

사망 원인별로 살펴보면 심장질환, 사고, 치매, 당뇨병, 자살, 살인 순으로 많은 초과사망이 발생했다. 논문의 저자들은 분석 결과를 살피면서 의료 서비스를 넘어 교육, 빈곤, 인종차별 등 사회경제적 조건 개선이 건강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자살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핵심 수단인 총기에 대해 규제 강화가 시급하다는 설명은,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에도 질리도록 등장하는 소재다.

장기적인 사망 격차를 살펴보는 연구도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높은 미국의 사망률은 청년, 중장년층이 더 많이 사망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미국의 25~44세 연령대 사망률은 다른 고소득 국가의 2~3배에 달하고, 남성에서 특히 심하다(☞바로가기: 미국의 기대수명이 뒤처진 이유: 국제 비교 관점에서). 약물 과다복용(opioid crisis)이나 총기 관련 사망, 교통사고처럼 병원에 도달하기 전에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요인들이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의료접근성의 격차는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마약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사회가 망해서 마약 중독이 늘어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경제학자인 앵거스 디턴은 앤 케이스와 함께 2020년 “절망의 죽음(death of despair)과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는 미국의 중년 백인 저학력층에서 나타난 사망률 증가에 주목하면서 미국 자본주의가 절망사의 구조적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극심한 건강 불평등은 병원의 탓이 아니다. 노동시장 붕괴와 교육을 경유한 배타적 계급재생산, 여기에 대응하는 복지 제도의 부재가 축적되어 만들어낸 결과이자 정치적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