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대학원의 교수는 중소기업의 사장과 비슷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직원 월급날에 급여로 나눠 줄 현금을 구해 고군분투하는 중소기업의 사장처럼 교수 역시 연구실 운영을 위해 각종 정부 과제와 산학 협력 과제를 찾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구나 학생지도에 들어가는 시간보다 돈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시간이 더 많다는 불만도 많다. 심지어는 최근에 대학원생 급여의 상한선이 높아지면서 월급을 좀 적게 받더라도 자기 공부만 하는 대학원생이 교수보다 팔자가 더 좋다는 말도 나온다. 이는 교수 한 명이 대학원생 십 수 명을 거느리는 공과대학이나 의과대학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원생을 지도하지 않아도 되는 연구직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대학이 아닌 정부출연연구소나 기업 연구소에 가면 학생을 지도할 필요가 아예 없거나, 지도를 하더라도 그 부담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더불어 학부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을 아예 안 해도 된다는 장점이 해당 직군을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참고자료:[김현철의 퍼스펙티브] 대학의 우수 인재 유치 없이는 대한민국 미래도 없다). 이러한 흐름 자체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의과대학 교수직이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수업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함께 한국 연구개발이 따라가야 할 롤모델로 제시되는 중국 역시 이름 있는 교수에게는 수업 부담을 줄여 주는 혜택이 주어진다. 이에 따라 연구를 업으로 삼는 이들은 연구비가 보장되면서도, 학생 지도에 대한 부담이 없고, 나아가 수업을 할 필요 없는 자리를 찾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대학이 ‘학생’ 유치하는 이유
이러한 흐름에 AI가 기름을 붓는 중이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생을 유치하는 이유는 일꾼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AI가 이들을 대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학을 갓 졸업하여 기초부터 새로이 가르쳐야할 뿐만 아니라 연구를 위한 동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인간 대학원생과 다르게 큰 훈련 없이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AI는 너무나도 편리하다. 연구의 많은 부분이 특별한 창의력을 요구하지 않는 단순 작업임을 고려하면 이미 기계가 사람보다 더 잘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통해 대학원생 숫자를 줄이면 연구실 운영 비용도 줄어들고, 이에 따라 연구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아지니 일석이조이다. AI가 학술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이다. 그야말로 학생도 없이 대학이 돌아가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AI 시대에 대학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글이 지면에 쏟아진다. 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대학이 어떻게 적응할지에 대한 내용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글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논지는 기술적 발전으로 예상되는 변화들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학의 교육 기능을 말살하고 단순한 실적 공장으로 만들자는 주장을 AI로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AI 때문에 대학이 논문 조립하는 컨베이어 벨트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논문 컨베이어 벨트’ 로 만들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AI를 방패로 정당화하는 것에 가깝다. 본질적으로 교육은 내팽개치고 논문으로 실적만 챙기고 싶은데 AI가 좋은 핑계가 되는 것이다.
대학과 대학원은 현재의 지식을 발전시키고 후대에 전달할 다음 세대를 양성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교육을 내버려두고 당장의 성과에만 치중하여 많은 실적을 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허점을 노리고 단기적 실적 생산에 사활을 거는 연구자가 적잖게 있다. 이들에게 AI는 연구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지금까지의 행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대학의 교육 기능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려웠지만 “AI로 시대가 바뀌어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나쁜 변화에 반대하는 것을 AI 이용에 반대하는 것 혹은 시대에 뒤처지는 것으로 폄하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AI 발전으로 인한 학생 소외는 AI가 아닌 사람의 작품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학생 교육에 들어가는 노력에 대해 불평하지만 원래도 교육은 일종의 부산물이었다. 대학원에서 교육이란 체계적인 교육과정이 아니라 연구 과제를 위해 노동하면서 부수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에 가까웠다. 많은 학생이 일을 하면서 공부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제비뽑기와 같은 교육 환경에서 공부를 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논문 조립하는 컨베이어 벨트’ 대신, 배움과 교육을 대학에
이미 교육을 성과의 ‘부산물’로 취급해 온 관행 속에서, 대학은 AI를 핑계로 ‘논문 조립하는 컨베이어 벨트’를 향해 다시 한번 변화하는 중이다. 그러나 배움과 교육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성과를 찍어내는 대학을 사회는 허용해야 하나? 고등교육과 연구기관이 지식 생산이라는, 사회적 목적을 다하게 하려면 우리는 이 흐름에 저항해야 한다. 그중 한 가지 변화는 교육을 연구 실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평가해 온 지금까지의 관행을 바꾸는 것이다. 학생은 연구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마법처럼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에 연구가 잘 이뤄진 것만 평가하면 교육의 질도 자동으로 담보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박사학위 졸업생은 없는데 논문 실적은 좋은 유수의 유명 연구실을 보고 있으면 완전히 틀린 생각임을 알 수 있다. 대형 논문에 집중하여 우수 학술지에 게재하는 일이 매우 잦은, ‘논문 조립 컨베이어 벨트’형 연구실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 대형 논문이란 많은 자원과 인력이 필요한 연구로, 대부분의 저자는 연구 과정에서 아주 협소한 영역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특히 이런 일은 학생에게 주어지기 마련이고 컨베이어 벨트 라인 하나 위에서 한 가지 일만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독립 연구자로 성장할 기회는 조금밖에 얻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간에서 회자되는 AI로 인한 대학의 변화는 주체를 완전히 호도하고 있다. AI라는 막을 수 없는 흐름에 대학이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교육을 삭제하고 싶은 이들이 AI를 핑계로 자신들의 계획에 더욱 힘을 싣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러한 변화는 막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막아야만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