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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소개] "의료는 생명을 구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실 절반만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의료는 실제로 우리의 생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까요? 이 시리즈는 건강에서 의료의 진정한 역할을 탐구합니다. 의사 파업 시 감소하는 사망률, 고비용 저효율의 미국 의료, 정체된 영국 NHS의 성과, 급격히 향상된 한국의 기대수명을 사례로 건강과 의료가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를 살펴봅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기술로 의료를 다시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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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출장을 다녀 오는 길이었다. 라디오에서 제약회사의 광고가 흘러나왔다.

“지금 태어나는 우리 손주는 150살까지 산다는데... 잘 살 수 있겠죠?”

당시 기대수명이 가장 높다는 일본도 아직 84세 남짓이었고, 계속 증가하던 OECD 평균 기대수명은 이듬해 감소했다. 기대수명이 높아지는 속도는 점점 더뎌지고 있는데, 도대체 '150'이라는 숫자에 깃든 바람은 무엇일까. 미국의 두 대학 교수가 인간 수명 150세를 두고 내기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진화론 관점에서 노화를 연구하는 오스태드는 2150년까지 최고 수명이 150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공중보건학자인 올샨스키는 기대수명은 의학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기에 그럴 일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2000년에 시작된 이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IT 산업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연구비를 투자하면서 '항노화'와 '영생'을 위한 산업이 팽창하고 있다. 150세 시대를 기대한 제약회사에게 기대수명은 이윤의 원천일 수 있겠지만, 우리의 관심은 올샨스키가 주장한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기대수명에 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 했듯 기대수명은 단순히 건강 지표를 넘어, 사회의 번영 혹은 쇠락을 반영한다.

정체하는 영국의 기대수명

형평성 관점에서 건강을 고민하는 영국의 마이클 마못은 2017년 건강형평성 연구소(Institute of Health Equity, IHE) 보고서를 통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영국의 기대수명 증가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통계청 자료를 분석해보니, 과거에는 여성의 출생 시 기대수명이 약 5년마다, 남성은 3년 반마다 1년씩 늘어났던 반면, 2010년 이후부터는 그 속도가 각각 10년과 6년으로 두 배 가까이 늦춰졌다(☞바로가기: 마멋 지표 2017 - 건강형평성연구소 브리핑). 20세기 후반 인구집단 건강의 뚜렷한 향상은 사회경제적 여건의 개선 덕분이라는 공중보건의 테제를 떠올리면, 아래 그림과 같이 10년 넘게 실질 GDP가 정체 중인 영국의 기대수명 증가세 둔화는 어쩌면 예견된 일일지도 모른다.

영국 실질 GDP 추이(출처: https://ifs.org.uk/publications/conservatives-and-economy-2010-24)

영국 실질 GDP 추이(출처: https://ifs.org.uk/publications/conservatives-and-economy-2010-24)

하지만 마못은 기대수명 증가 속도의 둔화가 단순히 생물학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제 수준을 가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영국의 기대수명이 뒤처지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했다. 이는 기대수명 증가 속도의 둔화라는 '긴급한 사안'이 우연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긴축과 기대수명

마못의 보고서가 발표되자 Hiam과 동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수명이 ‘증가하고 있다’며 일시적인 현상쯤으로 치부하며 낙관한 영국 보건부와 정치인들의 안일함을 비판했다(☞바로가기: 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기대수명이 ‘정체’하고 있나요?). 동시에 영국과 웨일스의 기대수명이 왜 정체됐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이들은 영국의 보건과 복지 재정의 만성적 부족,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한 정부의 긴축 정책, 브렉시트로 인한 재정 압박 등이 기대수명 정체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더욱이 기대수명 정체는 고령 여성과 저소득층 등 사회경제적으로 더욱 불리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나타난 불평등의 결과다. 그렇기에 Hiam과 동료들은 이 문제의 원인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철저하게 따져 묻고 조사하자고 촉구했다.

영국의 기대수명이 정체 조짐을 보이던 2010년은 신노동당에서 보수-자유민주당 연합으로 정권이 교체된 시기와 겹친다. 보수 연합 정부가 집권하면서 긴축을 시작했고, 신노동당 정부에서 도입한 건강불평등 감소 정책은 대부분 중단됐다. NHS 예산도 삭감했고, 이는 곧바로 건강 지표의 악화로 이어졌다(☞바로가기: 영국 신노동당의 건강불평등 전략이 영아사망률의 지리적 불평등에 미친 영향). 긴축의 전략 가운데 하나는 민간위탁이다. 보수 연합 정부는 2012년 보건복지법(Health and Social Care Act)를 제정하면서 지방 정부가 의료서비스를 민간에 위탁할 수 있도록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 결정은 결론적으로 의료의 질을 떨어뜨렸고, 치료 가능 사망률을 높였다(☞바로가기: 2013-2020년 의료 서비스의 민간위탁과 치료 가능 사망률).

"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The Body Economic: Why Austerity Kills)"의 저자 데이비드 스터클러는 사회 지출을 줄이는 긴축 조치가 두 가지 경로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바로가기: 긴축 정책과 건강: 영국과 유럽에 미치는 영향). 첫 번째 경로는 직접적인 보건의료의 긴축 효과다. 조세로 운영되는 NHS의 예산이 삭감되면 사람들은 병원을 이용하기 전에 더 오래 대기해야 하고, 치료 접근성과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두 번째 경로는 ‘사회적 위기 효과’다. 실업자가 늘어나고, 빈곤해지거나 집을 잃는 사람들이 생기고,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에 빠질 위험이 늘어난다. 경기침체와 경제적 불안정 모두 우울증 환자를 늘리고, 자살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영국의 ‘절망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