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글이 조금 더 잘 읽히게 하려는 목적으로, 뭐 하나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이 겪은 약간의 괴로움을 글에 동원하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때그때 다르다는 게 정답에 가깝겠지만, 답을 알면서도 글을 쓸 때마다 부딪히게 되는 어지러운 마음을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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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읽히는 글에는 글을 읽는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만한 경험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글도 대화의 한 종류니, 쓰는 사람의 경험을 노출하면 읽는 사람과의 거리를 쉽게 좁힐 수 있기 마련이다. 어려운 글, 복잡한 글, 긴 글은 나쁜 글로 여겨지는 시대니 나도 할 법한 경험에 너무 무겁지 않은 약간의 감상과 메시지를 곁들인 글을 잘 쓰는 게 좋은 글쓰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느 누구와도 다른 위치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을 재주 좋게 엮어내어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는 사람이 먹물이 아니기는 어렵다. 관심이 상품이 된 시대에 글이라는 매체를 여태 읽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이 소수의 전유물이 된 시대에, 공론장에는 흔히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아프다며 호소하는 글과 여기에 심취한 독자들의 감탄사가 넘쳐난다.

그렇지만 역시 ‘그 손톱 밑의 가시가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할밖에. 이 ‘손톱 밑 가시’들은 흔히 팔자가 좋은 사람들이 겪은 ‘개중에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일’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세상일이 원래 그런 게 아니던가. 그러면 ‘손톱 밑 가시’를 말하는 일이 그저 세련된 사적 발화에 지나는 게 아닌지 물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이 드레스가 파란색인지, 금색인지는 결국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이 드레스가 파란색인지, 금색인지는 결국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통계적 차별’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일을 겪었던 경험을 소재로 삼아 글을 쓴 적이 있다(☞ 불평등은 누구의 탓일까?). 차별은 누군가에게 권력을 주기만 하면 발생하는 것이어서, 최근에는 다른 직장에 지원했다 떨어진 것도 비슷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야 화나는 일이고, 또 소위 선배, 선생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에게도 실망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 경험이 ‘차별’이라는 사회적 차원의 이야기로 확장해도 괜찮은 일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는 시대, 내 경험을 공적 글쓰기에서 쓰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본다. 연구자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쓴다. 논문이든, 칼럼이든, 공적인 글쓰기인 한 그 목적은 언제나 유지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직접 겪은 일이든, 남이 겪은 일을 보거나 들은 것이든 경험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꿀 힘이 있는 몇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팔자 좋은 어느 사람이 겪은 일을 늘어놓는 정도의 글이 카프카의 도끼가 되어 사람들의 굳어버린 인식의 지평을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있을 법한 일로써 나의 경험이 글에 담겨야만 한다면, 적어도 글을 읽는 사람의 경험의 지평을 티끌만큼이라도 넓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하며 시시한 일들에 ‘경험’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가며 오늘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