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진단이 이뤄지는 과정은 의학 드라마에서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가장 유명한 의학 드라마 <하우스>의 주인공이 고도의 추리를 통해 질병을 진단하는 것과 다르게 대부분의 실제 진단은 암기와 족보를 통해 이뤄진다. 이는 진단하기 곤란한 질병보다 쉽게 진단할 수 있는 질병을 가진 환자가 훨씬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AI 업계에서는 중국발 ‘엔그램’ 기법이 공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쉬운 질문에 답하는 데는 깊게 생각하기 보다는 외운 답을 얘기하는 것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엔그램은 인공지능이 생각하지 않고 답을 찾을 수 있는 컨닝 페이퍼 같은 것으로 이를 이용하면 사고 능력이 떨어지는 작은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커다란 인공지능의 성능에 근접할 수 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찾는 거라면 새롭게 생각하는 것보다 있는 답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인 것이다.
의사들에게도 엔그램이 있을까? 이미 병원과 의사에게 엔그램 같은 컨닝 페이퍼를 팔아서 수익을 올리는 회사들이 많이 있고 병원과 대학은 상당한 비용을 구독료로 지급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UpToDate.com이다. 이 웹사이트는 다양한 질병과 약물, 그리고 치료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예컨데, 코비드-19 감염증을 검색하면 질병의 개요, 경과, 치료 및 관리가 전부 정리되어 있다. UptoDate 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빠른 속도로 갱신되는 의학정보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기능을 제공한다. 의사 개인이 매번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수고를 줄여주는 것이다. 이보다 상대적으로 원자료에 가까운 정보를 제공하는 비영리 단체로 코크란 도서관이 있다. 코크란 도서관은 다양한 여러 치료법에 대한 원자료를 종합하여 근거 수준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제시한 근거의 높고 낮음은 의사가 치료의 효과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시한다. 이러한 컨닝 페이퍼의 중요한 특징은 원자료가 가진 다양한 맥락과 복잡성을 최대한 증류하여 최대로 단순화된 도식을 의료인에게 제공한다는 점이다. 의료인은 이를 활용함으로써 더 효율적으로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의사들이 이러한 컨닝 페이퍼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컨닝 페이퍼의 관점으로 세상 전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식에서 벗어난 것을 쉽게 비과학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러한 태도는 의학 연구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의학에서 흔히 통용되는 개념으로 근거 피라미드라는 것이 있다. 앞서 언급한 코크란 도서관의 근거 수준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연구자의 통제 밖에서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관찰연구, 연구자가 통제하는 실험을 수집한 실험연구, 그리고 이러한 실험연구를 종합한 종설연구 순서로 근거 수준이 높아짐을 나타낸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장 권위가 높은 의학 학술지들은 실험연구와 종설연구만을 게재해왔다. 이러한 권위와 의사들에게 익숙한 단순한 도식을 등에 업은 근거 피라미드는 지금까지도 의학 연구 전반에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근거수준 피라미드. (c) 명승권.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1713803
이러한 관점은 컨닝 페이퍼가 익숙한 의료인에게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는 있어도 의학 연구가 갖는 복잡성을 모두 담지는 못한다. 특히, 의학은 다른 응용학문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요구한다.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통계학이 필수적이고, 연구 대상자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학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연구 대상자가 연구에 참여해서 중간에 탈락할 가능성을 줄이려면 심리학과 경제학적 지식이 모두 요구된다. 연구의 타당성은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으로 1차원적인 피라미드 하나로 파악할 수 없다.
때문에 주류 의학의 경직된 관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20년 넘게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았다. 코로나-19 감염증 팬데믹을 계기로 뉴잉글랜드 의학저널 (NEJM) 같은 권위있는 학술지들이 그간 매우 제한적으로 출판했던 관찰연구에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의학계도 의학 연구가 근거 피라미드로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차 수용하게 됐다.
이러한 바람직한 변화도 몇 가지 찜찜한 점을 남긴다. 왜 의학계는 다른 분야에서의 발전을 오랫동안 무시하다가 의학적 권위가 발동하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하는가? 외부의 권위는 최대한 무시하면서도 내부의 권위에는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좁게는 의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넓게는 사회적 진보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 의사 개개인의 성장과 해방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의학의 권위를 경유하지 않고는 새로운 지식을 좀처럼 수용하지 않는 관행에 젖어 있는 의사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경제적 지위와 자원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편파적 사고를 하곤 한다. HSC가 이미 ‘숫자의 정치’를 비판한 글(☞참고자료: 숫자의 정치를 넘어, 시민의 정치로)에서 봤듯이 의사수 추계같은 사회적 문제에도 끝까지 의학 전문가 현장 전문가를 호출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aside> 👾 의학은 다른 응용학문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요구한다.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통계학이 필수적이고, 연구 대상자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학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연구 대상자가 연구에 참여해서 중간에 탈락할 가능성을 줄이려면 심리학과 경제학적 지식이 모두 요구된다. 의학이 이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았다. 왜 의학계는 다른 분야에서의 발전을 오랫동안 무시하다가 의학적 권위가 발동하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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