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6일, 정부는 의대 정원을 2000명 증원해 2035년까지 의사 1만명을 확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는 2025년부터 2000명을 증원해 현재 3,058명에서 5,058명으로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것인데요, 연 5000명씩 현재 활동 의사 수가 12만 명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2031년부터 연 2,000명씩 추가 확충하면 2035년에는 1만 명의 추가 의사를 양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인 모양입니다(👉정책뉴스 바로가기: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 2025학년도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2035년까지 의사 1만명 확충”)
구체적인 증원 계획이 발표되자 의료계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발표 직후 한국의사협회 이필수 회장은 대회원 서신을 통해 사퇴 의사를 밝혔고, 결국 의사협회 집행부가 총사퇴하면서 의사협회는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구정 연휴의 마지막 날에는 대학병원 수련의를 대표하는 조직인 대한전공의협의회의 대의원총회가 있었는데요, 이 회의에서도 현 회장을 제외한 집행부 전원이 사퇴하고 비대위 체제로 전환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졌고, 의과대학 학생들도 집합 행동에 나설 분위기입니다. 집단 휴진 등 단체 행동에 대한 의견 표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보건복지부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일일브리핑을 할 정도로 적극 대응에 나서고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1960~70년대에 걸쳐서 한국의 의사들이 의대 증원에 대해 보였던 입장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관련 글 다시보기 👉 의사증원: 반대의 역사를 찾아① (1950-1970년대편)). 1968년부터 <의사수급장기계획>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의사의 도시집중현상은 뚜렷했기에 정부는 농촌의 의료를 책임질 의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의대를 신설하거나, 의학전문교제(4년제와 6년제 의사 양성), 메덱스 제도(비의사인력을 활용한 일차의료 공급) 등을 고려했지만대체로 의사들은 이 모든 제도에 반대하며 “의료의 질”을 강조해 왔습니다. 1970년대에는 의료가 사치재인지 아니면 필수재로서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지에 대한 논란이 등장하고, 1977년엔 의료보험이 도입되며 이를 둘러싼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1978년 즈음에는 늘어난 의과대학 졸업생에 비해 대도시의 취업자리가 부족해지면서 “의사의 황금기 퇴조”를 푸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반대를 꺾어 가며 진행되어 왔던 의료인력정책, 2024년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희 HSC의 구성원들은 의료인력정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특히 [정부 하기 나름이다] 시리즈에서는 ‘지역’ 의대의 모순적 위치(관련 글 다시보기 👉 ‘지역’ 의대의 두 얼굴)나 의사유인수요라는 반대 논거가 어떻게 의사 전문가주의와 배치되는지(관련 글 다시보기 👉 의사유인수요의 위험이라는 서글픈 반대를 생각하며), 의과대학과 연동된 전공의 수련제도가 어떻게 수도권 집중을 심화하는 데에 기여하는지(관련 글 다시보기 👉서울에 있는 의대는 어떻게 사람을 빨아들이나?) 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
의사 증원, 아니 이를 위한 의대 정원 확대는 사실 그리 새로운 문제는 아닙니다. 1편에서 1970년대 매년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학생 수가 천 명이 되지 않았었다는 걸 기억한다면 거기서 지금의 3천 58명이 되기까지 꾸준히 숫자가 늘어 왔을 테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의사 증원은 어떤 구도로 이루어져 왔을까요? 요번 글에서는 1980~90년대의 의사 증원을 둘러싼 논쟁을 훑어봅니다. 30~40년 전의 이야기이니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요. 하지만 지금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거나 전공의 수련을 받는, 건강정책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에겐 생소할 그 시절의 의사 증원 이야기를 훑어보는 일이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977년 국민의료보험이 도입된 후 신문 지면에서 “국민 누구나가 의료의 혜택을 골고루” 받을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염원이 본격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국가가 건강보장정책을 도입했지만 제도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한정적이고, 도시를 중심으로 보다 현대화된 의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농어촌에는 의료시설이 갖춰지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박정희 정부에서 시작한 국민의료보험은(지금은 국민건강보험으로 명칭이 바뀌었죠?) 500인 이상 사업장에 근무하는 대기업 근무자 먼저 의무 가입을 하도록 했습니다. 차츰 더 작은 사업장 가입자와 공무원, 교사 등을 그 대상으로 확대시켜 나갔죠. 결국 도시 대기업에 다니는 이들이 비교적 부담없는 비용을 내며 병원을 이용하는 동안 벽지 농어촌에선 보건소나 보건지소를 찾는 수 밖에 없었고, 이조차도 없는 경우엔 약제상이나 민간요법을 이용하는 상태가 지속되었을 겁니다.
1980년 2월 8일자 동아일보 사설에선 의료보험제도가 시작은 되었지만 300인 이상 사업장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이 되고, 의사들은 도시에 주로 있으니 국가가 나서서 농어촌 의료 공백을 해결하고 “의료 균점”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의촌에 이동의료시설 차량 등을 확보해 순회의료를 실시하고, 시군보건소에 의사를 확충할 수 있게 정부가 지역 의사들에게 충분히 대우를 하라는 당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당시 농어촌의 의료는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80년 5월 발표된 보건사회부의 농어촌 모자보건 실태조사를 살펴봅시다. 산전진찰과 분만은 가장 중요한 의료서비스일텐데요, 1979년 6월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농어촌 지역에서 가정분만율이 79.9%, 의사와 조산사, 간호원 등 의료인에 의한 분만개조를 받지 못한 경우가 65.6%였다고 해요. 10년 지나 90년 즈음이 되면 한국의 시설분만율은 98%에 육박하는데, 1980년만 해도 상황이 매우 달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